태식은 추석이 되자 다시 문희의 집을 찾았다. 특별히 문희 어머니에게는 찜질팩과 복대를 선물했고 문석에게는 신발을 선물했다. 태식의 집에도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는 편이어서 어머니 아버지가 특별히 집에 있을 것을 당부하였지만 쓸쓸하게 추석을 맞을 문희 가족을 생각하면 집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태식은 추석 당일 아침을 먹자마자 문희의 집으로 찾아 간 것이다.
신발을 받아든 문석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좋은 신발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듯 난감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태식은 문석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형! 이 구두는 제일 좋은 것으로 샀어. 물론, 형이 이걸 신을 기회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형이 자주 나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거야. 앞으로 나랑 문희랑 함께 외출도 하고 그래 알았지? 집에만 있으면 자꾸 사람이 작아지는 거야.”
태식은 문석을 설득하듯 이야기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휠체어도 준비할 예정임을 말해 주었다. 오랜만에 문희의 집은 활기가 넘쳤다. 미리 문희와 입을 맞추기도 했지만 미리 준비해 놓은 쌀가루를 반죽해 송편을 만들기도 했다. 이미 추석 당일에 송편을 만들어 먹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손님도 거의 찾아오지 않았고 명절다운 명절을 보내 본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태식은 송편을 함께 만들어 먹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반죽된 쌀가루로 송편을 빚는 문석의 얼굴에는 땀이 밸 정도로 열심이었다.
추석을 문희의 집에서 보낸 후로 문희의 집에서는 태식을 한 가족처럼 여겼다. 그 후로도 가끔 문희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태식은 문석과 문희의 어머니에게 놀러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문석은 태식의 어깨를 툭툭 치며 태식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머니 저 여자 친구가 있어요. 벌써 사귄지 몇 달 됐어요.”
“그래? 이 녀석이 만날 직장만 왔다 갔다 하는 줄 알았더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어느새 여자 친구를 만들었네. 그래 뭐하는 아가씨냐?”
“예, 저 S전자에 근무하고 있어요.”
“그래, 언제 한 번 집에 데려와라.”
태식은 추석이 지나고 겨울로 접어들 때쯤 어머니에게 문희 이야기를 비로소 꺼내었다. 어머니는 반가워했지만 아직 태근이 형이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결혼은 태근이 형이 결혼하고 나서 생각하라고 서둘러 못을 박고 나섰다.
“어머니도 참, 아직 사귄지 몇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결혼은요. 언제 한 번 데려 올게요.”
태식은 문희를 부모님께 벌써 소개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필경 부모님은 문희에게 집안의 사정과 형제관계를 물어 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희를 부모님께 소개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태식이가 자유롭게 문희의 집을 드나들듯이 문희도 자신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한 가족처럼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문희의 집 형편을 볼 때 부모님이 허락만 하신다면 가능한 한 빨리 문희와 결혼하고 싶었다. 태식은 자신이 사랑하는 문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빨리 결혼을 해 오빠와 그녀의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태식은 조급한 마음에 자신의 부모님께 하루속히 문희를 인사시키고 싶었던 것이었다.
형이 결혼하기 전에는 먼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듯이 어머니가 말씀 하셨지만 일단, 문희를 인사시키고 난 뒤 부모님을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뭐, 집에 인사를요?”
“응, 마침 이번 주말에는 봉사활동이 없으니 이번 토요일에 인사가면 어떨까 싶은데.”
“태식씨… 그건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아직 준비도 안됐는데.”
“문희씨, 무슨 준비가 필요해? 그냥 어머니 아버지께 가서 인사만 드리면 되는데 우리 부모님도 문희씨 보시면 좋아하시게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태식이 자신의 집에 인사하러 가자는 말에 문희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늘 자신의 집에 와 한 식구처럼 오빠를 대하고 어머니를 대하는 태식의 말을 차마 완강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화요일 저녁, 늦은 시간에야 만난 태식은 불현듯 문희의 옷을 바라보았다. 항상 입고 다니는 청바지에 하얀색과 빨간색 줄무늬가 가로로 교차되는 티셔츠에 파카, 물론 번갈아 가며 입는 옷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부모님께 소개하며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 가자?”
“어디를?”
“내가 옷 한 벌 사줄게.”
“아냐, 옷은…”
“고집 피우지 말고 같이 갔으면 좋겠어. 문희씨에게 잘 어울리는 옷 한 벌 내 손으로 사주고 싶어.”
그들은 화안동에서 태식의 차를 타고 시청 앞 지하상가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지하상가의 즐비한 가게들은 새벽녘에야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서둘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문희를 데리고 간 곳은 숙녀복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들어서자마자 갖가지 겨울 외투와 정장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골라봐.”
“여긴 너무 비쌀 것 같은데.”
문희는 망설였다. 그것은 옷값이 비싸서가 아니었다. 태식의 집에 인사하러 가면서도 자신의 손으로 옷을 사 입지 못하고 태식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거니와 마음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슬픔 때문이었다.
“문희씨, 괜찮아! 내 마음 알잖아?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옷이나 골라봐.”
그제야 문희는 진열된 여러 가지 옷들을 만져가며 둘러보았다.
문희가 고른 옷은 투피스였다. 무릎 위까지 살짝 드러나 보이는 검정색 치마에 하얗고 큰 단추가 달린 검정색 상의, 상의의 주머니와 옷깃에는 하얀색으로 줄무늬가 놓여 진 예쁜 옷이었다.
“야! 잘 어울린다. 꼭 새 색시 같은데?”
“놀리지 마요.”
“외투는 내가 골라줄게.”
태식은 탈의실에서 새로 산 투피스로 갈아입고 나온 문희의 모습에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너무나 문희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하얀색의 크고 둥근 단추가 문희 가슴에서 단정히 채워져 있는 모습이 문희의 미소와 너무 예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거 어때?”
태식이 골라 준 외투는 검정색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연회색의 것으로 엉덩이 부분까지 살짝 덮는 약간 긴 것이었고 양쪽 소매부분에는 앙증맞은 토끼털이 달려있는 단정해 보이는 코트였다.
“맘에 들어요. 태식씨가 골라 준 것으로 할게요.”
“한 번 입어봐!”
문희는 태식에게서 코트를 받아들고 자신이 입고 있던 투피스 위에 소매를 넣지 않고 걸쳐 보였다.
검정색의 투피스와 연회색의 외투는 하얀 얼굴을 가진 문희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특히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단정한 모습이 문희의 성격과 잘 조화를 이룬 것 같아 태식은 매우 흡족했다.
“이거 모두 얼마예요?”
태식은 점원으로 보이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야, 너무 잘 어울리네요. 꼭 맞춤 같아요. 이 옷 아무에게나 잘 어울리는 옷이 아닌데, 너무 예쁘네요.”
점원은 얼마냐는 태식의 물음에 답도 하지 않고 우선 문희의 모습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옷값으로 인해 사지 않겠다는 마음을 미리 예방이라도 하듯 연신 문희의 입고 있는 옷을 만져주었다.
“얼마예요?”
“아, 네! 투피스가 20% 세일해서 22만원에 코트가 16만원, 그러니까 38만원이네요.”
“계산해 주세요.”
태식은 카드를 내밀자 갑자기 문희가 가로막고 섰다.
“너무 비싸요. 이거 안 살래요.”
문희는 갑자기 입고 있던 외투를 벗으며 자신이 벗어 놓았던 청바지와 파카를 집어 들었다.
“아가씨, 이거 비싸지 않은 건데요? 그럼, 35만원만 주세요.”
점원 아가씨는 문희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금방 3만원을 깎아 주었다.
“문희씨 그러지 말고 사요. 계산해 주세요!”
태식은 점원에게 카드를 내밀었고 점원은 카드를 받아들고 계산대로 갔다.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싼데…”
“아이구, 공주님 그래도 당신에게 너무도 잘 어울려요.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태식은 문희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그제야 문희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가득 피어났다.
탈의실에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온 문희 손에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져 있었다.
“왜, 입고 가지?”
“참, 태식씨도 아까워서 어떻게 입어요? 토요일 날 태식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면서 입을래요.”
삐죽하게 입을 내민 문희의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1-7화는 @autom2000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