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이란 글자에 이끌려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소설 '칼의 노래'의 작가 '김훈'의 산문. '라면을 끓이며'를 우연히 본 후 난 산문이란 장르에 충격을 받았던 터였다.
작가의 실제 경험과 감상위주의, 소설보다도 더 진솔한, 그 작가의 향기가 (영혼의 향기가) 묻어나는 짧고 절도있는 글들의 이어지는 향연은 마치 제각기 향이 다른 여러 맛의 젤리와 사탕을 하나씩 집어먹는 것과 비슷했다고 비유하면 적절할 것 같다.
'이런 형식의 글이 있다니.'
신선한 충격에 몇번인가 산문을 써보고자 했지만, 아, 역시. 작가 본인의 경험에 깊이가 없다면 소설보다도 더 안써지는 게 산문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유명작가들(이래봐야 지금껏 두명의 산문뿐 읽지 못했지만)의 산문을 읽으면 그의 생애가 아주 입체감있게 다가오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것을 말로 해선 독자들이 이해할 길이 없고, 그 중에 선별한 짧은 산문 한편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할까 한다.
법무부 한정식
본문 30~37p
미셸 푸코는 권력의 전형들을 다루면서 군대와 감옥을 예로 들었다. 군대와 감옥은 인간의 신체를 중심으로 규율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길을 들이는' 곳이다. 이러한 체제가 병원과 학교의 통제까지 형성한 셈이다.
규율이라면 소싯적부터 지긋지긋했던 터에 군대 삼 년에 감옥에서 다섯 해를 지냈으니 한번 맛 좀 보라는 팔자였던 모양이다.
구치소에 있을 때에는 그래도 식사가 좋은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은 형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죄인은 아닌 셈인데다, 날마다 가족 친지들이 면회를 오고, 걸핏하면 변호사와 접견을 하게 되어서 관에서도 신경을 써주는 편이었다. 이른바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때려 조지고, 가족은 팔아 조지고, 피의자는 먹어 조진다'는 말처럼 친지들이 차입해준 구매물이 넘쳐나고 영치금도 쌓이기 마련이다. 그래도 돈도 빽도 없고 가족들도 돌아보지 않는 '개털'잡범들의 신세도 구치소 시절에는 영치품과 구매물의 인심이 후해서 살도 통통 찌고 속옷이나 침구 같은 준비도 구치소에서 마련하곤 했다.
사식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경제사범 같은 '범털'들은 관식을 거의 먹지 않고 입맛대로 골라 먹었다. 범털들은 구치소 식사를 '법무부 한정식'이라고 불렀는데, 구매물에는 없는 것이 없어서 밥과 국, 그리고 찬 두 가지의 규정식 외에 김, 각종 나물, 젓갈, 장조림, 장아찌, 통조림 등등 한 열가지 이상을 주욱 늘어놓고 먹었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라 교도관들도 점심에 직원식당으로 가지 않고 '소지'라고 하는 봉사원이 차려주는 백반상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반찬 가짓수가 얼마나 다양한가 하면 젓갈 한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오징어젓, 꼴뚜기젓, 명란젓, 어리굴젓, 새우젓 등속이 다 있으니 이건 징역을 사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가족들이 팔아 조져다가 수인을 먹는 일에 전념하도록 만든 꼴이었다.
이런 게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 때에 정착이 되어 '사식'이랍시고 번성하여왔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간 정부로 넘어온 뒤 한 해가 지나서 이 제도는 부조리의 온상이 된다고 하여 폐지되어버린다.
형이 확정되어 교도소로 이감을 갔는데 낯선 것은 그렇다 치고 우선 식사가 형편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사식은 아예 없고 구매물도 생활필수품 위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교도소 당국은 먹을 것으로 수인들을 교묘히 통제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지방 교도소는 시설도 열악하고 수인의 숫자도 많지 않아서 부식 구입에 불리하다. 하루 부식비가 수인 일인당 천 원 정도 되는데 거기에 연료비가 포함되어 있으니 매끼 삼백 원도 채 못 되는 셈이었다.
이전 같으면 구매물의 품목이라도 많아서 관급 부식이 신통찮아도 어떻게든 해결이 될 텐데, 부조리를 없앤다고 대폭 줄여서 일식삼찬이라는 원칙으로 또박또박 관식을 먹어야만 했다.
수인들은 모두 규율 면에서도 그렇고 의식주도, 교도소 안에서만은 풍성하고 헐렁했던 군사정권 시절이 훨씬 살기 좋았다고 원망 섞어 말했다. 그렇지만 형편이 나쁘면 나쁜대로 어떻게든 먹고살아갈 방도가 생기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다.
나는 요주의 인물 취급을 받아서 일반수들은 물론 다른 젊은 정치범들과도 분리되어 징역을 살았다.
처음 몇 년 빡빡하던 시절에는 일반 잡범들의 사동 맨 끝에 복도를 철창으로 막고 독방을 만들어 수용했다. 그것은 일반수들 십여 명이 합방하는 3.5평짜리를 세 칸으로 나눈 방이었는데, 벽 두께며 창과 문짝 등속으로 방 하나가 그야말로 0.8평 정도의 넓이였다.
일반수들은 모두가 취역수들이라 낮에는 소내 공장에 나가고 드넓은 사동에 나 혼자 남게 마련이었다. 그러니 아래층에 미취역수들 방이 있어서 교도관이 지키고는 있었지만 수시로 나를 시찰하러 이층까지 올라올 수는 없었다.
독방에 혼자 두자니 사람 속을 알 수가 없어 언제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이라도 할지, 혹은 화가 나서 자해라도 할 지, 아니면 기묘한 수를 내어 탈옥을 꾀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그래서 관구에서 생각해낸 방책이 나에게 봉사원을 붙여준 것이다. 교도관이라도 높은 사람이나 그들을 봉사원이라고 부르지 사실은 수인부터 담당 교도관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일제 시대 그대로의 이름인 '소지'라고 부른다. 한자말로 청소를 뜻하는 '소제'의 일본식 발음이다. 제도가 말을 규정한다고도 하고 그 반대라고도 하지만, 일제 시대 거의 그대로의 행형 제도가 아직도 옥내 용어를 일본말로 남겨두고 있는 셈이다.
하여튼 그래서 평균 육 개월씩 잡아서 나와 함께 생활한 소지가 오 년 동안 십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사동 안팎의 청소를 담당하고 하루 세 끼니의 배식을 하며, 안에 갇혀 있는 수인들과 복도에서 수직하는 교도관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한다. 그리고 수인들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거일동을 담당에게 알려주는 은밀한 임무도 맡는다. 특별 독거수가 된 나 하나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이라 그랬는지 소지들은 서로 내 담당이 되려고 애를 썼다.
그들은 대개가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라 내게는 거의 아들뻘이나 마찬가지였고 죄명도 갖가지였다. 겪다보니 내게 소지로 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절도가 아닌가.
같은 죄수 신세로 그들의 수발을 받는 데 별다른 불평이 있을 리가 없지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관구 계장에게 물었다.
"어째서 내게 보내는 아이들은 모두 절도 출신입니까?"
"왜요, 뭐 불편하세요"
"아니, 점잖게 탈영병이라든가 혹은 교통사고라든가 있지 않소."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오죽 게으르면 군대 생활도 제대로 못 견디고 탈영을 했겠어요. 교통사고 출신도 젊은 애들은 거의가 음주에 뺑소니에 인명 사고인데, 놀기만 좋아하고 뺀질뺀질하지요."
"그럼 절도는?"
"도둑질, 그거 부지런해야 먹구삽니다. 미리미리 털 집을 봐둬야죠, 시간 맞춰 현장 도착해 망봐야죠, 숨어서 기다려야죠, 직접 털어야지요. 무거운 짐 지고 도망가야죠, 장물아비 찾아서 처분해야지......한두 가집니까? 그애들 여기 오면 참 양순한 애들입니다. 부지런하고 순하고 아주 소지로 맞춤하지요."
나는 계장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다분히 일리가 있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교도소 수인들 사이에서도 절도는 그냥 '도둑놈'이라고 하여 서열상 맨 아래다. 그것은 교도관들이 수인들을 멸시하여 부르는 총칭이 '도둑놈들'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맨 위가 깡패들을 부르는 '조폭'이며 우습게 취급받는 이들은 '물총'이라고 하는 강간범인데, 처음에 신입으로 입방했을 때만 그렇지 결국 이들도 절도 취급은 받지 않는다. 절도는 서럽고 배고픈 놈들이라는 점에서 감옥 먹이사슬의 맨 하위 계층인 셈이다.
나는 이 단순한 젊은이들과 매일의 끼니를 의논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을 친조카나 자식처럼 사랑하게 된 경우도 여럿이었다. 언젠가는 '소지열전'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을 정도다.
건오라고 해두자. 건오는 문화재 절도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해서 계모 밑에서 시달리다가 부산으로 가출을 했다.
중국집 배달 소년에서 시작하여 음식점을 전전하면서 경양식 기술을 익혔다. 부지런히 벌어먹고 살 만한데, 전에 같이 일하던 녀석이 절도로 몇 번 금불상이며 탱화며 하는 값진 것들을 털어왔다. 그래서 그 장물들을 건오 자취방에 맡겨두었다.
일부는 자기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 같이 동거하던 술집에 나가는 여자친구가 돈이 궁색하여 몰래 금불상 하나를 내다가 골동품점에 팔려고 했다. 주인은 대번에 이것이 수배된 장물인 것을 알아보고 신고했다. 그래서 건오는 영문도 모르고 일망타진된다.
...내가 건오를 잊지 못하는 것은 열여덟 차례의 단식을 했던 중에서 가장 길고 혹독했던 이십이 일간의 본단식과 한 달 남짓한 복식을 치른 그 긴긴 겨울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산문은 소설과는 다른, 짧지만 응축된 맛이 있다. 그런 산문을 몇편을 읽다보면 글을 쓴 작자가 어떠한 인물인가가 자연히 윤곽이 잡히며 떠오르기도 한다.
반면 짧아서 가볍게 읽기도 좋지만 여운은 긴 글보다 더욱 오래 남는다.
이것이 내가 산문을 애정하는 이유다.
이것 외에도 교도소 안에서 '된장과 마가린과 삶은 감자 등속으로 짜장면 비슷하게 만들어 먹기라든가, 삶은 라면발에 두유를 부어서 콩국수를 만들어 먹기, 또는 국에서 건진 두부와 콩나물과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를 다지고 밀가루 반죽을 밀어서 만두 해먹기 등등의'-본문 43p- 범치기 요리와
군복무시절 훈련중 주둔소 밖에서 텐트치고 아영하다 아랫마을로 내려와 닭을 훔쳐와 모가지를 꺾어 몰래 철모를 냄비삼아 내장도 끄집어내지 않은 채 부대원들과 살아먹고, 심지어 고구마를 미끼삼아 돼지새끼 한마리를 서리해 잡아먹었다가 땅에 몰래 파묻은 돼지다리가 나오는 통에 들통나 영창을 갔던 이야기.-본문21p-
'맥주조차 대단히 근사하고 품위 있는 주종이었던, 양식당이라곤 고작 서울역과 명동등 도회지에 서넛이 있는게 다였던 시절, 난생처음 애플파이와 칵테일을 시켜먹었던 그 날의 맛과 체험이 읽는 이들로 하여금 군침이 돌게 하며, 웃음이 나게도 하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묘사하는 풍경과 서술들 속에 녹아들어있는 한국적인 풍경과 정서가 무척이나 친근감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글들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잊고 있었던 비슷한 경험들을 떠올리며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소하지만 뿌리깊은 우리 생활의 단편들이다.
이런 글들은 우리가 사소하게 지나쳤지만 훗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언젠가 지나쳤었던 일상의 순간들을 다시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산문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여담이지만 왜 사소한 것이 큰 것보다 무의식속에 오래 남으며 정서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는 것일까?
어쩌면, 마치 인류와 지구상의 생물들이 작은 소리는 크게듣지만 정작 지구가 공전하는 거대한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정말로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범위가 너무나 거대해 느끼질 못하며, 작은것에 정신이 팔려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의 깊이는 사소한 모든 순간이 우리의 영혼에 맞닿아 있음을 깨닿는 것에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난 배우자와 사느냐, 성적을 어떻게 받았느냐 따위가 아니라, 배우자와 보낸 시간, 교실에 앉아 내가 보낸 시간 따위가 시간이 지나면 우리 가슴속에 응어리진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맛있는 산문'이다.
일종의 글로 읽는 먹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여타의 다른 먹방들과 다른 점은 황석영 작가의 '밥도둑'은 우리에게 식욕뿐만 아니라 음식에 얽힌 추억과 정서까지도 파문을 일으켜 간지럼태운다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 특히 누군가와 함께 나눠먹는 다는 것은 물질적 충족 이상의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고급 요리보다 어린시절 먹었던 '떡볶이'의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가 광주항쟁을 기록한 책을 출판하다 적발되 국외추방당했을 때, 스페인에서 마늘 수프를 먹고는 그 어딘지 비스무리하고 익숙한 맛과 향에 우리나라 '된장찌개'를 떠올리며 그리워했듯이 말이다.(본문 144~150p)
........식욕과 감성을 함께 자극하고 싶다면, 강력 추천한다.
'황석영의 밥도둑'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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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긴 젓가락으로 서로 먹여주는 천국이 이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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