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자신이 졸업 했던 사립 학교에 교사로 오면서 학생들에게 파격적인 방식으로 교육시킨다. 보수적인 학교측에서 보자면 전복과 파격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교육의 관점에서 보자면 커다란 울림을 준다. 제목의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 Society)’는 학생들의 비밀 조직의 명칭으로 숨막힘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고리이다. ‘죽은 시인’의 은유는 꿈과 희망이 없는 소외된 사람들이 허공에 뜬 자유시를 불러대며 아무 질서 없이 오로지 쾌락과 타락, 현실 도피, 무질서한 자유를 노래하는 시인이지 않을까. 그래서 기존 질서에서 보자면 키팅 선생님은 위험하다. 책의 첫 장을 찢고 책상 위에 올라가 시를 낭송하고, 책상 위에 올라가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삐딱하게 된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이렇게 이미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한 교육을 뛰어 넘은 키팅 선생님은 랑시에르가 말한 ‘무지한 스승’ 해방된 자이고, 해방과 기존 질서의 억압에서 혼란스러운 그의 학생들은 죽은 시인, 즉 '무지한 인민'과 일치하지 않으련지.
랑시에르의 책 <무지한 스승>의 자코토
랑시에르는 프랑스의 교육 현실에 빗대서 자코토의 방식을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지식의 평등’을 기술한다. 19세기의 무지한 스승의 해방된 자와 해방시키는 자라는 파격적인 방식을 제시한 자코토을 20세기의 현재로 불러들여 말하고 있다. 우선 동시성의 현재의 배경을 보자면 1981년 프랑스의 사회민주당의 미테랑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사바리는 피에르 부르디와 파세롱의 사회학적 연구를 접목 시켜 교육 개혁을 하고자 했다. 구별짓기에 의한 아비투스는 계급화를 재생산한다는 연구 결과를 통해 모든 학생들이 평등하고 계급간 학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아이들의 수준에 교육을 맞추려하는 진보주의적인 사회주의 성향의 교육 개혁 방안이었다. 이후 1984년 사바리 후임의 장 피에르 슈벤느망은 경쟁력 위주의 교육철학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을 선별하는 방식을 중점적으로 제도화하려 했다. 프랑스어 기초 수업 강화, 시험 및 선별 제도 강화, 공민 교육 강화의 도입으로 학생들을 학력의 결과로 변별화시켜 서열화 하고자 했다. 이런 교육제도의 변화를 비판하기 위해 랑시에르는 19세기 혁명적 방식으로 교육을 증명했던 자코토를 20세기로 소환하고자 했다.
스승과 제자의 불평등한 관계가 학생으로 하여금 학급 욕구를 불러 일으키며 뒤처지는 아이들을 위해 하향 평준화하면 교육의 질 자체도 낮아진다는 논리이다. (이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수사들이다.) 스승과 제자의 불평등, 지식의 보편성이라는 공리주의에 대한 믿음의 방안이다. 진보적 사회주의와 보수적 공화주자들의 논쟁 속에서 랑시에르는 18세기 혁명적인 교육방식을 제창한 자코토의 무지한 스승을 끌어드림으로써 논쟁 자체를 전제된 평등으로 바꿔 놓으려 한다.
조제프 자코토는 1818년 네덜란드 루뱅 대학에 프랑스 교사로 임명되어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됐다. 네덜란드 학생들은 전혀 프랑스어를 못했고,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몰랐다.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사이의 번역 관계가 전혀 없는 와중에 프랑스어를 수업해야 하는 희한한 상황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학생들에게 쥐어주고 첫 문장 “칼립소는 하지 못했다.”를 되풀이하게 했다. 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첫 문장을 시작으로 한장 한장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자코토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친 행위는 없었다. 그는 단지 익힌 것에 대해 말하고, 학생들이 본 것,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 학생들이 행한 것을 말하라고 질문하고, 배움의 의지를 주문했을 뿐이다.
“스승이란 구하는 자가 그의 길을 계속 가도록 유지하는 자이다. 그 그 길에서 구하는 자는 혼자 구해야 하며 구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무지 위에는 위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무지한 스승과 제자는 지적인 평등을 이룬다. 그리고 수업의 결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반 학생들이 완벽하게, 문학적 해석에까지 도달하는 프랑스어를 구사 할 수 있었다. 무지했던 학생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스스로 익힌 것이다. 자코토에 의하면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스스로 배울 수 있다. 스승과 제자는 의지와 의지의 관계만 성립하는 것으로 두 관계를 지적으로 평등하게 이어준다. 그리고 무지한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 스승이 되는 본인 스스로 해방 해야 한다. 무지한 자가 스승이 모르는 것을 홀로 배우려 할 때 스승을 그것을 할 수 있음을 믿어주고, 그의 능력을 현실화하도록 역량의 고리를 준다. 무지의 스승으로 인해 해방된 자가 되고, 그리고 그는 스스로 해방시키기 위한 무지의 스승이 되는 의지의 연쇄 순환 고리가 된다.
“보편적 가르침의 수단을 일러주었다. 무언가를 배우라, 그리고 그것을 이 원리,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을 연결하라.”
보수적인, 진보적인 교육 방식의 바보 만들기
그러나 해방하지 않고 가르지는 자는 학생을 바보를 만든다. 스스로 유능한자라고 여기며 학생들을 계몽화 시켜야 한다는 이중성의 폭력적 교육 방식으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낸 허구이다. 교육에 있어서 유식한 정신과 무지한 정신, 성숙한 정신과 미숙한 정신,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 똑똑한 자와 바보 같은 자로 분할되어 있는 세계의 우화 같은 것이다.”
선생은 항상 학생의 한 발 앞에 서 있으려 한다. 선생이라는 설명자는 학생이라는 열등한 존재의 우월의식을 이용하여 가르고, 교육자는 이러한 결과로 학생의 무지를 앎으로 전환하면서 구분 짓기를 한다. 근대 정치가 시작된 이후 줄곧 자유, 박애(인권)과 함께 기본적 태제였던 평등이 언제나 구호에 불과한 불평등함으로 남아있었던 이유가 설명된다. 위에 서있는 자들은 항상 우월하고, 밑에 있는 자들은 항상 위를 바라보며 끊임 없는 노력으로 성숙함에 도달해야 한다는 오만함이 그것이다. 당시의 진보론자의 전제는 한걸음씩 점진적으로 교육을 통해서 인민을 계몽화 시키는 것이었다. 개선된 길로 가기 위해서는 무지한 인민들에게 계몽을 위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수직화된 방식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을 위해 불평등을 먼저 전제화 시키고 계급을 합리화 시킨다. 결국 또 다른 지배원리, 자코토의 말에 의하면 “바보 만들기” 정책일 수 밖에 없다.
결론을 짓자면 평등은 도달 해야 할 정치 목표가 아니라, 이미 인간은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서 정치 제도가 이뤄져야 한다. 인민, 만인의 평등이 자유를 침해한다는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지금은 불평등하지만 더 많은 평등을 위한 제도화를 주장하는 진보의 방식은 자코토가 비판한 바보 만들기의 구식의 방식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의 ‘죽은 시인’과 랑시에르에 의해 소환된 자코토의 ‘무지한 스승’은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다. 해방된 자는 무지한 스승이고, 해방되려는 자는 지적 평등에 의한 무지한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