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방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이자 한국사의 풍운아로 불리는 김옥균이 말한 내용입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김옥균은 학문, 문장, 시, 글씨, 그림, 바둑 등 다재다능하고 총명했으며 어릴 적부터 명문 귀족 출신 수재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 친구들과 함께 교류하면서 1870년대부터 개화사상을 배우게 되었고 훗날 갑신정변에 주역이 되지요
하지만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아홉 명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에 망명생활을 하는 김옥균은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조선과, 그를 이용하려는 일본 사이에서 있었고 일본은 그를 강제로 섬에 연금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망명생활 중에서도 조선을 걱정하던 김옥균은 1894년 청나라를 이끌고 있던 이홍장과의 담판을 위해 청으로 건너갔다가 조선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왜 바둑의 역사에서 김옥균에 대해 소개할까요?
오늘은 우리나라 바둑에 보급에 시초가 된 혼인보 슈에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그의 절친인 김옥균을 먼저 소개하고 시작합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몰락해가는 바둑계와 그 바둑계의 수장인 혼인보 슈에이
그는 제14대 혼인보 슈와의 둘째 아들로서 10세 때 후계자가 없었던 하야시 가문에 들어가 13대 하야시가 되지만 혼인보 슈호에 의해 호엔샤가 설립되고 혼인보 가문이 약화되자 1884년 하야시 가문을 떠나 친동생인 16대 혼인보 슈겐에 이어 17대 혼인보가 됩니다.
호엔샤와 경쟁하기보다는 상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슈호에게 18대 혼인보를 맡기게 되지만 슈호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다시 19대 혼인보가 됩니다.
(혼인보 슈호 https://steemit.com/kr/@mooyeobpark/47hiec)
300년 전통의 혼인보 가문을 이끌고 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하루하루 나날이 쇠락해 존폐의 위기에 처해있고 나머지 가문은 이미 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녔습니다.
하루하루 괴로움에 치여살아가는 슈에이는 갑신정변에 실패, 일본으로 망명한 개혁파의 거두 김옥균을 만나자마자 반해 서로 절친이 됩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김옥균을 우대하였지만 이후 청나라와 조선 정부의 눈치를 보며 김옥균을 박해하기 시작하며 홋카이도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홋카이도로 떠나는 배에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던 슈에이는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김옥균과 같이 유배를 가버립니다.
또한 김옥균이 오가사와라라는 섬에 유배되었을 때도 슈에이는 수천리 뱃길을 이동해 그곳에서 몇 달을 함께 지냅니다. (이정도면 절친 맞지요?)
김옥균은 슈에이와 바둑을 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혼인보가에 큰 결정에도 깊게 개입하였는데
메이지 유신과 함께 몰락해가는 일본 바둑에서는 ‘바둑을 두느니 말똥을 줍는 게 낫다 ‘라는 이야기도 돌고 있는 상태에서 김옥균이 슈에이에게 다무라 호주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다무라 호주는 이산가족을 만나는 회사를 차리다 망하고 절에 들어가 주지스님을 상대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다가 미국 이민을 하려고 하였으나 그 마저도 잘 안되고 힘든고 지친 상황에서 김옥균을 만나게 되고 김옥균은 절친인 혼인보 슈에이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슈에이는 족보도 없고 이익만 찾아 헤매는 다무라 호주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김옥균의 설득에 그를 문하로 받아들이고 시험기를 거쳐 단번에 4 단증을 줍니다.
이로부터 18년 후 슈에이가 죽고 다무라호주는 혼인보슈사이라는 마지막 명인이자 혼인보로 이름을 남기게 되지요.
일본 바둑계가 일어나는데 김옥균이 큰 도움을 준 셈입니다.
그 둘의 우정으로 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일화는 이전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부목반(浮木盤)입니다.
부목반은 물 위에 뜨는 바둑판이라는 뜻으로 혼인보가의 가전 보물입니다.
직업 바둑에 탄생을 알린 전국시대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가 산을 따라 오르던 중 깊은 곳에 백룡이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보니 용이 아니라 폭포 아래에 큰 나무가 떠나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나무를 가져다가 바둑판을 만들어 본인의 바둑 스승인 혼인보신샤에게 주었고 그 바둑판은 혼인보 가문에 보물이 됩니다.
이전 포스팅에서 혼인보 슈호는 이 부목반을 안고 춤을 추었다고 이야기한 게 기억나시나요?
그만큼 대단한 가보임이 분명합니다
이 부목반이 어떻게 쓰였느냐..
김옥균이 슈에이 집을 방문하여 이야기합니다.
집에 밥상이 없어서 불편하니 뭔가 쓸만한 게 있으면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우리 가문도 뭐 지금 실정이 이래서 마찬가지랍니다. 쪼금 오래되었지만 바둑판이 하나 여유가 있으니 이거라도 가지고 가세요라고 하고 가문의 가보인 부목반을 가르쳤고
김옥균은 이거라면 바둑도 둘 수 있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하숙집으로 가지고 가게 됩니다.
가문을 상징하던 가보가 식탁이 될 정도로 당시 바둑계가 안 좋았던 소리지요
그리고 김옥균이 죽은 후 부목반의 행적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김옥균의 은봉
바둑연구가이자 바둑의 역사를 저보다 100배는 잘 아는 이승우 교수님은 일본에 한 창고에서
김옥균이 쓰던 은봉(바둑판)을 찾아냅니다.
이 판은 혼인보 슈에쓰가 사용하던 것을 슈에이의 소개로 김옥균이 갖게 되었는데 유배 생활할 때도 이 판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1894년 상하이로 이홍장을 만나러 갈 때는 죽음을 예감한 걸까요? 망명생활 중 많은 도움을 받은 한 일본인에게 물려주었다고 전해집니다.
한국기원은 현대바둑 50주년을 맞이할 때 바둑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바둑판의 반환을 일본기원 측에 요청하여 현재는 한국기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886년 2월 20일 도쿄 혼인보가에서돈 혼인보 슈에이와 김옥균 이둔 6점의 바둑은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현대식 기보로 기록되어 있답니다.
이렇듯 일본 바둑계의 일인자는 한국인과 교류하게 되고 슈사이 이후 일본 바둑의 수장이었던 세고에 겐사쿠가 조훈현을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고 조훈현은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일본 바둑의 정기를 흡수하여 세계 최강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제 매일 보시던 혼인보 시리즈는 마지막 한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 바둑역사는 대부분 마무리가 되고 다시 한국으로 넘어갈 때가 되어가고 있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