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전도사 박원장입니다
포스팅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전 포스팅에서 제목을
한국사의 풍운아 김옥균과 두 번의 혼인보 슈사이라고 적었는데 슈에이를 잘못 적었습니다.
17대 19대 혼인보는 혼인보 슈에이며 마지막 혼인보 21대가 슈사이 임을 정정해드립니다.
이름이 하도 비슷비슷해서 저도 헷갈렸네요 죄송합니다 ㅠㅠ
오늘은 마지막 혼인보 불패의명인 혼인보슈사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21대 혼인보 슈사이(秀哉 1874~1940) 혼인보 가문의 마지막 당주이자 일본 전통바둑 최후의 명인입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의 ‘명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답니다.
본명이 다무라호쥬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시절을 보냈고 사업을 했으나 망하고 절에 들어가 주지스님의 바둑 상대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면서 한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에 이민을 시도하였으나 선교사의 죽음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그때 한국사의 풍운아 김옥균을 만나게 되고 그의 절친인 혼인보 슈에이를 소개받을 수 있었습니다. 슈에이는 다무라 호주는 맘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김옥균의 소개로 그와 시험기를 두게 되고 그를 문하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단번에 4 단증을 주게 됩니다.
이후에 혼인보에서 공부하면서 김옥균과도 친해져 오가사와라 제도에 유배당했을 때도 김옥균을 찾아가 바둑을 두었다고 합니다.
1907년 슈에이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게 되고 1년간 슈겐이 혼인보를 잠시 맡았다가 1908년 혼인보가의 양대 실력자인 다무라 호쥬(혼인보 슈사이)와 다무라와 가리가네(雁金準一)와 대결을 펼치게 되고 그 대국에서 승리한 다무라 호쥬는 혼인보 가문의 21세 당주로 혼인보 전통에 따라 혼인보 슈사이(秀哉)라고 불리게 됩니다.
1914년에는 명인이 되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나라에서 지원하는 녹이 없어져서 계속 힘든 입장이 있었고 호엔샤로 시작된 근대화 바둑에 선구를 이끌던 이 단체는 1924년 재벌 오쿠라의 주도로 일본기원이 창설되면서 현대바둑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됩니다.
1938년 더 이상 세습 혼인보를 두지 않기로 결정하고 일본기원에 혼인보라는 이름을 양도하기로 하면서 마지막 세습 혼인보가 됩니다.
혼인보는 1세 혼인보 신샤부터 마지막 21대 혼인보 슈사이까지 21대까지 350년이상 존재하였던 그들의 최후는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산업시대의 등장, 그리고 근대화된 일본기원의 등장 등으로 인하여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바둑을 대표하는 수장으로서 현대바둑 변화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혼인보라는 이름을 내놓으면서 본인방이라는 타이틀전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혼인보와 본인방은 같은 뜻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또한 새로운 시대의 선수들의 도전 또한 받아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대국 중 하나로 오청원과의 대국을 들 수 있습니다.
(오청원 포스팅 https://steemit.com/kr/@mooyeobpark/76uxhh)
당시 바둑에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오청원은 슈사이와의 대국을 통해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지요.
대국 당시 일본 바둑계 최고수였던 슈사이 명인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대국에서 오청원은 자신이 창안한 신포석을 보여줍니다.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 호쾌했다’라고 평하는 사람이 있는가면,
‘오청원이 천하의 슈사이 명인을 상대로 천원을 두었다’며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만큼 그 바둑은 세간에 관심을 받았습니다.
1933년 10월 16일에 시작되어 다음 해 1월 29일에 끝난 이 바둑은 3개월이 넘게 대국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도나 예로써 바둑을 두는 경우가 많았기에 명인 슈사이가 오늘은 여기까지 라고 하면 대국이 중지되고 며칠 후에 다시 진행되곤 합니다.
오청원 입장에서는 불리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온 명인의 권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지요
(역시 권력이란..)
3개월 동안 13차례의 대국 중단을 거듭한 이 바둑은 팽팽한 접전 끝에 160수에 이르러 슈사이의 묘수로써 2집을 승리하게 됩니다.
당시 이 대국은 바둑을 두는 것보다 묘수풀이를 좋아한다는 슈사이의 제자 마에다가 기막힌 묘수를 발견하게 되어 훈수로 진행되었다는 찝찝한 뒷이야기를 남기게 되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 봉수 제도가 탄생되었습니다.
(봉수란 다음에 둘 착점을 상대방이 못 보도록 기보에 적어서 밀봉한 채 입회인(심판)에게 맡겼다가 대국을 속개할 때 개봉하는 것을 말합니다.)
뭐 어찌 되었건 이 ’ 불패의 명인‘과 ’ 신포석의 창시자‘가 맞붙은 이 대국은 주최사인 요미우리 신문은 판매부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는 등 대 흥행을 이뤄냈고 당시 일본 바둑계는 세간에 주목을 받으며 현대바둑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발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슈사이는 생애 마지막 대국 또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은퇴기로써 마이니치 신문이 기획한 ’ 불패의 명인 슈사이 은퇴기‘의 도전자를 고르기 위해 일본기원이 1년에 걸쳐 시합을 벌였고 도전권은 30세의 젊은 강자 기타니미노루7단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기타니미노루는 오청원과 함께 신포석을 신포석을 연구한 라이벌이자 동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조기에 은퇴하여 차린 기타니도장에는 우리나라의 조남철, 김인, 조치훈등도 그의 제자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포스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한시간은 각자 40시간, 제한시간 최장시간으로 이 대국은 6개월이 걸린 대국입니다.
(지금까지 대국 중 가장 오래 둔 대국 기록과 최초의 봉수가 시행된 역사적인 대국입니다.)
전국에 유명한 정원을 옮겨가며 14번 동안 두어졌고 65세에 슈사이 명인은 병으로 쓰러져 병원에 가면서까지 이 대국에 열과 성을 다하지만 결국 5집을 지게 됩니다.
슈사이는 과거를 부정하는 신포석을 싫어했고 신포석에 상징인 오청원과 기타니에게 이기기 위한 그의 집념은 굉장했다고 합니다. 바둑에서 들어간 소비시간은 슈사이는 34시간,
늙은기사의 긴 대국시간은 그의 생명을 태웠고 이듬해 사망하게 됩니다.
투혼을 바친 대국은 가와바타가 ’ 명인‘이라는 소설을 써내려감으로써 노벨상을 받게 됩니다.
최후의 혼인보 슈사이는 마지막 혼인보답게 승부사였고 본인을 끝으로 세습을 종료하면서 그 이름을 건 기전을 시작함으로써 현대바둑의 지평은 열어낸 과거의 거목이었습니다.
현재 혼인보는 본인방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본인방전이라고도 하여 아직까지 일본 3대 프로 타이틀 기전에 대표적인 대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봉수 제도를 만들고, 대국 최장시간을 기록하며 현대바둑에게 새로운열쇠를 주고 간 마지막 혼인보 슈사이..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
혼인보의 역사 자체가 일본 바둑의 역사라 할 수 있으니 현대화 바둑으로 오기까지의 바둑역사를 모두 하나씩 보게 되었군요
무언가 큰일을 끝낸 것 같아서 저 혼자 뿌듯해하고 있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혼인보편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