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는 필리핀 도우미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 하는 맞벌이 부부들이 많다.
언젠가 마트에 갔는데 생후 한달이나 되었을까 꼬물꼬물한 갓난아기가 유모차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아기는 봐주는 사람이 없이 홀로 과일코너 옆에 놓여진 유모차에 덩그러니 있었다.
나는 엄마가 왜 바로 옆에 있지 않은지 옆을 두리번거렸는데 몇 발자국 떨어진 야채 코너에 한 필리핀 여성이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야채를 집은 후 유모차 쪽으로 다가오더니 유모차를 밀고 가는 것이었다.
필리핀 여성이라고 해서 꼭 그 분이 엄마가 아니고 도우미일 것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갓난아기를 떨어뜨리고 혼자 야채를 고르러 간 행동을 보아 그 여성이 엄마가 아닐 것으로 추정했다.
엄마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갓난아기를 밖에 홀로 떨어뜨려놓지 않는다. 아주 잠시일지 모르지만 그 순간 누가 아기를 데려갈지 어떻게 아는가.
나는 그것을 보고 느꼈다.
‘소중한 것엔 눈을 떼지 못한다’ 고..
그것은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고 너무나 소중하기에 내가 자발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 모두는 ‘나에겐 이것이 소중해’ ‘나는 이렇게 살거야’ 라고 생각하는 목표 혹은 이상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과 그저 꿈으로만 남기는 사람의 차이는 어쩌면 ‘진실로 그것을 소중히 생각하는가’의 여부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머릿속으로는 그것을 소중히 생각한다고 하지만 가슴속으로 진정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과 다를 때가 있다. 비록 우리가 인식은 못할지라도.
우리가 이런 저런 핑계를 대 ‘하고 싶지만’ 결국 ‘하지 않는’ 일이 많은 이유는 결국은 그것이 나에게 그 정도로는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인인 남편과 연애 시절 나는 한국에, 남편은 중국에 있어 나는 남편의 연락을 자주 기다리고 문자의 답장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으나 남편은 언제나 ‘바빠서’ 못 했다는 말만 했다.
그래서 그때 내가 한 얘기는 이렇다.
“바빠도 화장실은 안 가? 밥은 안 먹어? 화장실 갈 시간에, 밥 먹을 시간에 답장하면 안돼?”
글쓰기를 시작한지 이년이 다 되어간다. 우연히 인터넷에 글을 올린 후 나의 마음을 알아간다는 기쁨, 사람들이 보내주는 반응을 보며 느끼는 희열.
그 후로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아기를 키우는 입장으로 언제나 시간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기띠로 아기를 업고 쓰기도 하고 재우고 쓰기도 하고 어찌됐든 어떻게든 시간이 있든 없든 시간을 만들어내 쓰고 있다.
이것이 나를 살게 하니까.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니까.
“미안. 정말 너무 만나고 싶은데, 연락하고 싶은데 바빠서 못 했네.” 라는 말은 사실은 ‘미안. 너가 그만큼 나한테 중요하진 않아. 나에겐 너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 라는 잘 포장된 말이다.
정말 소중하다면 눈을 떼지 않는다.
아니, 떼지 못 한다.
내가 그것에 눈을 떼지 못 하기에 나의 꾸준한 관심이라는 양분을 먹고 자란 나의 소중한 그것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그러니 우리의 어떤 것이 진척이 안 되고 항상 정체되어 있다면, 그것이 과연 나에게 소중한 것인가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져 사실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인데 소중함을 어느새 잊어버리진 않았는지 되새겨 봐야한다.
이것이 나에게 왜 소중한지, 왜 나는 이 일을 해야하는지 내 인생의 ‘소중 리스트’ 를 정리해봐야 한다.
소중하다고 착각했던 것이 있을수도 있고, 소중한데 이건 별거 아니라고 착각한 것이 있을수도 있다.
나에게 진정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부터 확실히 재정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