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시작하고 내 숨겨진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이해해가고 있다.
나란 사람에 대해 내가 오해했던 것, 부끄러워했던 것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나를 망친 줄만 알았던, 결코 나는 원치 않았던 내용의 과거가 원하든 원치 않든 현재의 나를 만들었고 그것은 미우나 고우나 한평생 함께 해야 하는 내새끼들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정신승리는 더더욱 강력해져 마치 고통이 더 아름다운 나를 만든 양, 추한 것을 예쁜 포장지로 포장하고 포장하는 기술만 늘어가고 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배우는 것이 없고 성숙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한치의 망설임 없이 택할 것이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는 이렇게 태어났고 나를 구하는 방법은 위대한 합리화밖에 없는데 말이다.
나는 언제까지고 세상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신이 인간에게 주신 강력한 선물 ‘합리화’를 하며 웃으며 살려고 할 것이다.
“시궁창에 있어도 누군가는 별을 본다”는 말처럼 ‘나는 비록 시궁창이지만 별을 볼 수 있어 다행이잖아.’하며 시궁창보다는 별에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별은 나를 시궁창 냄새에서, 현실의 그 지독한 구린내에서 나를 구해줄 것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라며 애써 룰루랄라 긍정 심리학 마인드로 무장하다 보면 자살까지는 면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세상을, 나의 마음을 단면만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과 나 자신에게 추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모든 것에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하지 않게 되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감사하지 않는 내 자신이 괴씸하고 한심하게 느껴질지라도 말이다.
심리학자 융은 “나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다.
세상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기를 종용하고 우리 자신도 우리 스스로가 선한 사람이라 여겼지만 문득 문득 자신의 이기심, 추한 단면을 볼 때는 나 자신도 그러한 나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융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그림자를 대신 남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을 ‘투사’라고 했고 “우리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투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해야지만 나와 타인을 괴롭게 하는 투사를 멈추고 드디어 우리는 멀리서 반짝이는 나만의 별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행복해보이는 사람도 다 저마다의 고통을 지고 사는 것처럼, 현실은 제각기 시궁창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궁창 안에서도 반짝이는 별은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시궁창에 집중하여 구린 내에 질식해 허덕거리며 인상 찌푸리며 살던지, 아니면 멀리 반짝이는 잡힐 듯 안 잡힐 듯한 별에 집중하여 별의 아름다움을 즐길 것인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정도의 선택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위대하게도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살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