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애틀 하면 떠오르는 것이 뭐가 있을까.
파이크 플레이스의 스타벅스가 있겠고, 90년대 사춘기를 보낸 사람들이라면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 주연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혹은 MS? Amazon? Boeing?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시애틀이라는 지명에서 그런지 Grunge 를 피해 갈 수 없다. 빌보드 차트에서 독보적으로 1위를 차지하던 마이클 잭슨의 앨범, Dangerous 를 끌어내렸던 너바나 Nirvana 를 위시해 펄잼,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 가든, 머더 러브 본, 머드 허니 등등 90년대를 풍미했던 밴드들의 고향이 시애틀이고 무려 지미 헨드릭스의 고향이 이곳 시애틀이니 말이다.
위시카 강가의 진흙투성이 강둑에서 방황하던 청춘들에 의해 탄생한 문화가 한 시대를 뒤흔들었기에, 시애틀에는 음악 관련 박물관이 있다. EMP (Experience Music Project) 박물관으로 2000년에 개장해, 2016년에는 MoPOP (Museum of POP culture) 으로 리뉴얼 하면서 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다루게 됐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아직 EMP 였던 시절로, 일종의 성지 순례에 버금가는 마음가짐으로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2009년이었는데, 샌디에이고에 머물고 있을 때 뜬금없이 일주일의 무급 휴가가 주어졌었다. 당시에는 금융위기의 혼란이 한참 진행 중이던 때라 사측에서 인건비를 줄이고자 눈물겹게 벌이던 사투의 일환으로 상당수 직원에게 무급 휴가를 줬던 것이다. 하루하루 날아오는 채권을 해결하고자 사투를 벌이던 회사를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다만 당시 어렸던 나는 무급이어도 그저 휴가가 생긴 것이 즐거워 이럼 여행 가야 하는 각인데. 하는 생각에 무작정 차를 몰았고, 잠깐 고민하다 목적지를 시애틀로 정했다. 그저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아마도 최대한 멀리 다녀오고 싶었을 것이다.
아.. 아주 쵸큼 무리했나.. 싶은 생각이 든 건 샌프란시스코 근처를 지날 때였다. 한 예닐곱 시간 달리니 조금 피곤했기에, 목적지를 다른 곳으로 잡을까 잠깐 고민하던 때 화들짝 머릿속에 떠오른 게 EMP 였다. EMP 에 한번 꽂히고부터는 불굴의 의지로 다른 목적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운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샌프란시스코를 지나기까지 7시간 동안은 시애틀 가서 뭐 할지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들떠있기만 했다는 소리. 내가 여행하는 스타일이 그렇다. 일단 가면서 생각하기..
미국에서, 특히 서부에서 로드 트립은 전혀 어려울 게 없다. 길 찾는 것도 어려울 게 없는 게, 네비가 보여주는 것처럼 주구장창 달리다 571마일 앞에서 좌회전 한번 하면 된다. 대충 900km 동안은 하염없이 직진만 하면 되니 얼마나 편한가.
그런데 이렇게 개념 없이 무작정 출발하면 오밤중에 도착하게 되기도 한다. 운전 시간만 20시간이 넘을 정도의 장거리였으니 중간중간의 계획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리 미련하게 달렸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가는 길 자체가 재밌기도 했고, 도착하자니 시애틀답게 짙게 깔린 안개가 운치 있다며 또 좋다고 꺅꺅 거렸지만.. 그저 막연히 좋았던 거지 정확히 뭐가 그리 좋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짧게 시애틀의 밤안개를 즐기고 아무 숙소나 잡아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아침에 나오니 안개는 여전했다. EMP 는 시애틀의 관광 명소 스페이스 니들과 바로 붙어있다. 그러니 스페이스 니들 방문 계획이 있다면 그런지에 별로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 들러보길 추천한다. 시애틀과 그런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말이다.
EMP 에 들어서자마자 아 내가 성지에 발을 디뎠구나 실감했던 것이, 인포 데스크에서 일하는 직원마저도 기타를 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시애틀 다운 장면인지. 정말 멋진 도시다. 본격 EMP 에 들어서면 KISS 형님의 살벌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밀랍과, 기타로 만든 트리가 맞이한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인상적인 환경이 또 있을까.
EMP 내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 기타나 베이스를 직접 연주해볼 수 있는 부스들도 있고, 영상 자료실도 많았다. 하지만 사진이 죄다 흔들려 쓸만한 사진이 없어 아쉽다. 제일 흥미로웠던 곳은 아래 사진들이 진열된 통로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귀한 자료들이 나열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었다.
사실 개인 성향에 따라 전혀 감흥이 없는 박물관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곳이 EMP 이지만, 시애틀에 대해 온전히 알아보고자 하면 지나쳐서는 안되는 곳이다. 그런지는 커피나 IT, 항공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의 크기로 시애틀을 대변하는 단어이며, 시애틀에 엄청난 문화적 자부심과 성취감을 안겨준 유산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지나치게 된다면 스킵하지 마시길...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