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탈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탈것에 집착했다. 자전거나 스케이트보드를 그렇게 좋아했다. 내가 태어난 아파트 단지는 경사진 언덕이 많았다. 언덕을 따라 탈것을 타고 내려가는 행위에서 희열을 느끼는 데는 환경의 영향도 한몫했나 싶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사라진 그 아파트 한쪽 구석에 경사가 상당히 심한 언덕이 하나 있었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언덕이라 자동차나 오토바이도 다닐 수 있었지만, 언덕의 끝이 놀이터로 향하는 계단에 막혀있기에, 자동차의 왕래는 거의 없는 그런 언덕이었다. 길이는 조금 과장하면 100미터 정도는 됐을 것 같다. 겨울이 시작되고 제법 눈이라도 내리면 어김없이 그 언덕은 눈으로 덮였고, 곧 일종의 훌륭한 슬로프로 변신했다.
눈이 내려 쌓이기 시작하면 온 동네 아이들은 일종의 광분 상태에 빠졌다. 우리 형제도 마찬가지여서 눈이 쌓인다 싶으면 온몸을 겹겹의 옷으로 꽁꽁 싸맨 채 언덕으로 뛰어갔고, 이미 나와있는 동네 형 동생들이랑 눈을 퍼다 언덕으로 날랐다. 꼬꼬마들이 나르면 얼마나 날라겠냐만은, 얼른 눈이 충분히 쌓인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싶다는 일념 하에 법석을 떨었다.
눈이 제대로 쌓이면 곧 온갖 탈것들이 등장했다.
마음이 급했던 애들은 어디서 대충 비닐봉지를 구해와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 언덕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어떤 애들은 누군가 내다 버린 작은 나무 탁자를 거꾸로 엎어 놓고 썰매를 탔다. 탁자 다리는 손잡이 역할도 해서 나름 안정적인 자세들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비닐봉지 같은 경우에는 충격 흡수가 전혀 안돼 한번 타고나면 엉덩이가 상당히 아팠고, 야생(?)에서 급조하는 탈것들은 속도가 충분히 나지 않았다. 탁자를 엎어 놓은 경우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비유하자면 다른 탈것들은 롤러코스터요, 탁자는 회전목마였다랄까.
이렇게 원시적이었던 탈것들이 점점 진화를 시작했었는데, 어느 날 속도와 충격 흡수를 단번에 해결한 신소재가 등장했다. 비닐장판. 표면이 매끄러워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랐고, 약간의 쿠션이 있어 비닐봉지 대비 승차감이 비약적으로 개선됐다. 다만 주행 방향 컨트롤이 굉장히 어려웠기에, 가끔 언덕 위를 바라보는 자세로 언덕 끝에 도착하고는 했다.
이 작디작은 시장의 수요를 파악한 거상 a.k.a 문방구 아저씨는 곧 스키 를 가게에 들여놓으셨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스키 모양을 흉내 낸 탈것으로, 길이는 40-50cm 정도였다. 발과 스키를 연결해주는 바인딩 따위는 없는 글자 그대로 조악한 플라스틱 판때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게 또 한바탕 동네에 유행을 했다. 언덕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서 스키를 11자로 가지런히 두고 쪼그려 뛰기 자세에서 한발 한발 얹으면 이내 스르륵 미끄러지기 시작해, 곧 엄청난 스피드를 냈었다. 너도나도 쪼그려 뛰기 자세를 취한 건 스키가 짧기에 서서 타면 균형을 잡기가 굉장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끔 국민학생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임 형아들 중 서서 타는 형이 있으면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다.
이 스키는 모든 면에서 훌륭한 탈 것이었는데, 단점이 있다면 바인딩이 없기에 타고 내려가다 넘어졌을 때 스키 혼자 쩌- 멀리 달아나 주우러 가는 데 한참 걸렸고, 아부지에게는 훌륭한 매가 된다는 점이었다. 이 스키는 짧고 가벼운 데다 넓적한 플라스틱인지라 스윙에 아주 적합했고, 허벅지나 엉덩이에 떨어지면 쫙쫙 달라붙어 좋나게 아팠다. 덕분에 쑥 마늘만 먹지 않고도 사람이 됐지만 아파도 너무 아팠다. 혹시나 사진이 있을까 싶어 뒤져봤는데 없다. 정녕 고대 유물인가 보다. 생김새는 상상에 맡기자..
이렇듯 도구라는 것은 그 소재와 형태가 굉장히 중요하다.
사용 목적에 부합하는 소재와 형태가 최적을 이룰 때 그 기능이 최대치로 뿜어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보더들은 본인들이 추구하는 라이딩 Riding 에 맞춰 장비를 갖추게 된다. 흔히 스노보드라 부르는 판때기의 명칭이 데크 deck 인데,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데크들 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다. 단순히 턴을 하며 슬로프를 내려가는 라이딩 에 적합한 데크가 있다면, 설면에서 점프를 하거나 점프 후 돌리는 그라운드 트릭 또는 줄여서 그트라고도 함 데 적합한 데크가 있고, 킥이라 부르는 점프대로 진입할 때 타는 데크도 있다. 경우에 따라 기물을 타는 용으로 데크를 준비하기도 하고, 모든 걸 다하는 데 적합한 올라운드 데크도 있다.
역시 길어져 또 나눠야겠다.
마치기 전에 동영상을 하나 남긴다. 꼬꼬마 딸들과 보딩 하는 준프로급 아부지의 라이딩 영상이다. 나도 저렇게 귀엽고 이쁜 딸들의 딸바보 아빠가 돼서 보드 태워주고 싶다. 물론 영상보다는 안전하게.ㅎㅎㅎ 아이들 너무 귀엽다.
[영화 패터슨의 마지막 장면-하이쿠] 너무 바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즐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