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오늘도 비가 내린다. 봄이 오는 줄 알아서 화창한 날씨와 만개한 꽃을 상상하며 지냈더니 나를 놀리는 것 마냥 비가 간헐적으로 내린다. 어떤 날엔 아침부터, 또 어떤 날에는 별빛과 함께. 아직 몸에 남아있는 피곤함을 비와 나이 탓으로 돌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툭하고 발에 무언가 걸린다. 새벽밤에 침대 머리 맡에 쌓아둔 짐 상자가 쓰러져 내 얼굴을 덮쳤었다. 어렵게 잠든 나를 깨운 것에 화가 나 무작정 던져버린 것만 기억나는데 그렇게 멀리가진 못했다. 운동이 필요한걸까.
세면대로 가 얼굴에 찬 물을 끼얹으니 전원 버튼을 누른 컴퓨터 마냥 오늘 할 일들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못다 한 짐정리를 해야한다. 내 소중한 전축이 아직 상자에 고이 모셔져있는게 떠오른다. 먼저 꺼내뒀다가는 행여나 다른 짐을 정리하다 부딪혀 망가질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딪힐 걱정할 만큼 짐이 많지도, 방이 좁지도 않았다. 괜한 걱정을 하는 것에 대해 세금을 매겨야 미래의 나는 편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텅 비어 깨끗했던 방을 내 물건들을 장식하는 것으로 더럽히고 나니 내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내 집이고, 내 방인 것 같다. 여기에 커피만 있다면 더 좋겠는데.
내 이야기가 페이지를 생각보다 많이 차지해버렸다. 오늘 들어온 나의 공간을 고정시키려면 어쩔 수 없으니 양해해줬으면 좋겠다. 어디보자... 이 페이지의 주인공은... 티프샤다. 티프샤가 있는 곳은 어느 소세계에서 꽤 유명한 지주(地主)의 땅이다. 지주의 이름은 유리이고, 상징은 달이다. 대화 키워드는 어린 놈, 미친 놈, 경계?
"그래, 티프샤. 잘 지냈니?"
"응, 그럭 저럭."
왜소한 몸에 깻잎머리를 한 소년이 의자에 올라타 쪼그려 앉았다. 갈색 머리며, 갈색 눈동자며, 머리 스타일이며, 행동이며, 하나도 안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씁쓸한 표정까지도. 나는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설탕이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내려왔고, 티프샤에게는 커피우유를 줬다.
"네가 권력을 얻게 된 경위가 어떻게 되지?"
티프샤는 지주인 유리를 도와 땅을 지배하는 다섯 명의 권력자 중에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어린 나이에 등용된 사람이기도 하다.
"유리한테 졸랐어. 나한테도 사람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어딜 가나 너무 시끄러웠거든."
할 말을 잃었다. 어떠한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총명한 것도 아닌 녀석이 조르기만 했다고 권력을 줬다고?
"매일 매일 유리가 다닐만한 곳을 찾아가서 내가 더이상 이 땅에 싸움이 안일어나도록 할테니 통치권을 달라고 했어. 한 5일을 쫓아다녔던가? 그랬더니 단 일주일만 나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다고 했어. 그래서 총을 들고 나가서 소리가 나는 곳은 다 쏴버렸지."
이 녀석이 임시 권력자로 취임하기 전에 유리의 땅에선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굉장히 잦았다. 유리와 권력자들은 토양의 개선과 외교에 모든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지 서민들의 생활에 대해선 신경쓰지 못했다. 거리엔 항상 서로를 헐뜯는 욕설이 가득했다. 비옥한 토지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은 재무제표에 기록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었다. 서민들 중에는 자신이 뿌리내린 땅이 잘 되길 바라서 각자의 개선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 방향이 너무도 제각각이었다. 권력자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지주 권력과 서민들 사이에는 벽이 쌓였던 것이다.
그 상황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던지 간에 티프샤에게는 자신의 생활 반경 내에 일어나는 불쾌한 상황을 견디기 싫었고, 유리에게는 바쁜 자신이 신경 쓰지 못하는 일에 대해 몇날 며칠을 쫓아다니며 무언가 해보겠다고 달려드는 꼬맹이가 있는 것이다.
"일주일 내내 시끄러운 녀석들을 쫓아내면서 쉬지 않고 돌아다녔어. 그리고 유리를 만나러 갔더니 정식 권력자로 임명해줬어. 정말 조용해졌거든."
티프샤가 권력을 가진지 한 달정도 되었을 땐 더 이상 싸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욕설과 싸움은 물론 고성마저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낸 평화가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티프샤가 취한건 공포 정치를 통한 평화였지만, 애초에 공포 정치라는 개념을 티프샤가 알 리가 없었다는게 내게는 의문이다. 정치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어린 녀석이 유화정책이 아니라 공포정치를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사람의 본성인가? 아니면 그렇게 선택하게 만든 환경이라는게 있는 것인가? 인격으로부터 나온 판단이라면 공포정치를 택한 티프샤는 매사에 공격적인 성향을 띄는 것일까?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나 자문을 반복하던 중에 티프샤가 입을 열었다.
"유리한테 내가 사람들을 너무 억압하는게 아닌가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어. 조금 더 유하게 대하는게 좋을지 상담했었거든. '다른 권력자들처럼 지내는게 좋을까?' 하고."
티프샤는 커피우유를 조금 마시고는 이어서 말했다.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미친 놈이라는 소리가 질리기 시작해서."
정의 집행은 선악의 판단과 별개다. 정의 또한 서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진다. 티프샤가 정의의 편이라고 한다면 티프샤에 의해 억압되고 쫓겨난 사람들의 억울함은 당연한 감정이 되어야할까? 아니, 이미 집행 당한 사람에 대한건 여기선 고려하지 말자. 평화로워진 유리의 땅에는 폭력성이 걷혀졌음에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악을 걷어내었다 해도, 그 악에 대해 감정 이입을 하면, 다른 악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걷어진 악의 입장에서 악은 티프샤다. 티프샤는 자신만의 정의로 악을 걷어내었지만 또 다른 악의 역할을 맡아야만 했다. 쫓겨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티프샤를 항상 경계했다.
"그랬더니 유리가 '계속 멋대로 휘두르라고 놔둔건데, 니가 안한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하지 뭐야? 웃기지 않아?"
티프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이 녀석은 항상 이 맘때가 되면 웃는다. 그 말이 어지간히도 즐거웠나보다. 모두가 경계하게 되어서 자신의 정의에 의심하게 되었을 때 너는 옳다고 거들어주는 것처럼 들렸었나보다.
그 이후에 티프샤는 유리의 땅에서 벗어나 몸을 숨겼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티프샤는 지켜나갔다. 자신의 정의를 강하게 밀어붙였을 때, 선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운 악이 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지내게 되었다. 나는 티프샤를 쓰다듬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커피 사오는거 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