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일본의 근대시기, 일본의 근대문학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럼에도 <문학과 근대와 일본>을 읽게 된 건 친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 중에 일본문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있다. 그래서인지 나를 만나면 자연스레 일본문학 이야기를 하는데 물론 내가 그 친구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할 순 없다. 게다가 나는 일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인과 악감정이 있었거나 일본에서 불쾌한 경험을 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과 역사적으로 늘 절대적인 관계였고 지금도 위안부 문제가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딱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일본의 근대시기와 문학이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나는 보통 문학은 문학이고, 역사는 역사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문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와 뗄 수 없는 일본 근대문학이라는 점에서 문학에 대한 시각을 좀 더 확장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최근 <문학과 근대와 일본>이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 재직중인 윤상인 교수이다.
이 책의 맨 처음에 나오는 내용은 ‘한국인에게 일본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요즘 서점에서 많이 팔리는 문학은 일본 문학, 특히 일본 장르소설이나 라이트노벨이다.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등과 같은 초대형 순수문학 작가들의 작품도 잘 팔리긴 하지만 역시 대중들에게 소위 ‘가장 잘 먹히는 문학’은 재미있는 장르소설이다. 따라서 나는 일본문학하면 가장 먼저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의 장르소설이 떠오른다. 작가의 국적이 비록 일본이긴 하지만 국적에서 오는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 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에게 일본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이 책의 32쪽에 의하면 오랫동안 일본문학은 한국 평단의 비평적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이후 서양 소설의 번역(일본어에서의 중역을 포함)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일본 문학에 대한 무관심은 서양 문학과 일본 문학을 좌표축의 대극에 배치한 후, 한국 문학의 좌표를 서양 문학에 더 가까운 곳에서 산출하고자 한 데서 유래했다. 식민지 시대의 일본 문학처럼 신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목사의 기능조차도 부여되지 않았다. 1980년대까지 일본 문학은 영미, 프랑스, 독일, 러시아 문학으로 구성된 주류 문학권의 아래 층위에 위치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구도에 지각변동이 생겼다.
그 변동의 중심에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었다. 1989년 <상실의 시대>가 문학사상사에서 출판되면서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하루키 신드롬’이 조성되었고, 광복 후 그 어느 외국 작가도 누리지 못했던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소설은 물론이고, 여행기나 신변잡기풍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전 저작이 빠짐없이 번역된 예는 일찍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의 33쪽부터 34쪽에 의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본주의 성숙기에 접어든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성찰하게 하는 화두가 되었다. 미우라 아야코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노벨상 작가들에 대해서도 인색하기만 했던 국내 평단의 비평적 관심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이는 무라카미라는 외국 작가가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문학적 현실 속에서 상수적 존재가 되었음을 말해준다고 한다.
이렇듯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 일본문학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할이 크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신간이 한국에 소개될 때마다 포털 뉴스에 소개될만큼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작가이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사진 중의 하나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한국에 소개되던 날, 그 책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던 독자들을 찍은 사진이다. 하지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사실 왜 그의 작품이 인기가 많은지, 그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이 책의 96쪽에 보면 하루키의 거의 모든 소설이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판되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 현직 대학교수가 하루키에 고나한 2권의 연구서까지 냈다고 한다. <뉴요커>에서는 하루키가 월간지 <신초>에 연재했던 <도쿄기담집>을 거의 동시에 게재했다고 하며, 하루키 소설이 각국의 독서 대중 사이에서 호의적인 독자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아무튼 저자는 36쪽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나 한류의 예에서 보듯이,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지역 내의 문화 이동은 트랜스내셔널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국민문학의 담장이 형해화하고 있는 지금, 일본 문학이 새롭게 대두한 문화적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좌표축에서 어떤 성격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될지 면밀한 관찰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 ‘한국인에게 일본 문학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차지하고 있는 반면에 중간 부분을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메이지 시대와 일본 근대문학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105쪽에 의하면 8세기 초부터 에도 시대 말까지 그 기본 골격을 유지해온 일본의 천황제는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크게 변화했다. 다시 말해, 오랫동안에 걸쳐 천황에게 부여되어온 정신적 ,문화적 ‘권위’에 덧붙여 정치적 ‘권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실질적인 황권 통치의 길을 연 근대 천황제가 성립된 것이다. 일본의 근대문학 역시 메이지 유신에 그 기점을 둔다.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활발하게 유입된 서구 문학의 충격은 문학에 대한 전통적 관념의 수정으로 이어졌고, 서구 근대의 기준에 입각한 문학의 계량이 추진되었다. 따라서 일본 근대문학이 걸어온 길은 근대 천황제의 궤적과 평행선상에 놓인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은 일본 근대문학사의 기술에 있어서 메이지 문학, 다이쇼 문학, 쇼와 문학 같이 천황의 연호에 따른 시대구분이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한다.
<문학과 근대와 일본>은 앞부분을 읽을 땐 어렵게 느껴졌지만 뒤로 갈수록 가독성이 높아진다. 또한 일본의 근대문학, 메이지 시대에 대해서 좀 더 찾아봐야겠다는 욕심도 생긴다. 그리고 대중소설만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문학 역시 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