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일 때문에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 뜻 밖의 시를 하나 발견 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었는데요. 시간도 늦었고, 한번 천천히 읽어봤습니다. 읽고, 다시 읽고, 생각하며 다시 읽어 보면서
“이런 시 였구나. 이게 이렇게 좋았구나.”
얼마 전 칼 세이건의 책 ‘창백한 푸른점’의 감상을 접했습니다. 참 감동적이면서도 삶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글이었습니다. 짧은 글이 가지는 힘일 것입니다.
최근 이 두 번의 경험을 하면서 왜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문학을 우리는 보통 학교에서 처음 접하게 됩니다. 교과서와 참고서, 수능지문에서 접합니다. 그것을 분석하고, 단어 별로 찢어 발겨서 암기하고, 수능 시험장에 토해낸 뒤 영원한 안녕을 외칩니다.
왜 지금 읽어보니 이렇게 좋은 시를, 문학들을 삶에서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 수능이란 비극 앞에서 대면했어야 했을까.
왜 그렇게 암기하고, 알고 있는 것이 문학 작품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라 여겼던 것일까.
사실 수능 공부를 할 때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몰랐던 것 같아요.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이런 감정이 들지 않았는데, 그 감정이라고 암기해야 하고, 그 감정이 들지 않으면 내가 틀린거니 그렇게 바꾸어야 하는 억지.
20대가 지나고 나서야, 수능을 본지 10년이 지나 그것이 무엇인지 희미해질 때가 되어서야 문학을 문학답게 즐길 수 있는 아이러니.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접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출생의 배경과 시대적 상황, 단어마다 여러 학자들이 분석한 내용을 습득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온전히 내가 그것을 읽고, 느끼고, 받아들이고, 좋다면 외우고, 지나가면 그만인 것이죠.
학생들도, 모든 사람들도 시를 시 답게 접하고, 소설을 소설 답게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