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화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을 그리 좋아 하지 않는다. 이는 어떤 과학적 논의와는 다른 문제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러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적자생존의 방식으로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양육강식의 세상 속에 내가 하루 하루 살아가야 한다는 강요를 받아드리고 싶지 않다. 나에게는 오늘도 적자생존이나 양육강식과는 전혀 상관 없는 만남이 있었고, 그러한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
일을 하며 간혹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 말하는 이들이 있다. 진화의 사고 방식이다. 남을 죽이고, 밟아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공생하며 살아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남과 함께 살아갈 때 더 길게 간다.
우주가 너무도 커서 나란 존재는 우주 속에 먼지 티끌 같은 존재이므로, 가치 없는 존재라 일컬어짐을 듣는 것이 싫다. 온 우주가 크다고 해서 내가 작은 것이 아니다. 숲이 울창하다 해서 나무 한 그루가 작은 것이 아니다. 숲의 규모가 클 수록 각각의 나무들이 보이지 않을 지 몰라도, 나무의 가치는 동일하다.
파시즘과 나치즘을 정당화 했던 살육의 야만성이 싫다. 또한 나의 존재를 작아짐으로 만들어 자살로 이르게 하는 그 태도와 발상이 싫다. 작고, 연약하니 죽여도 된다는 발상이 싫다. 세상 영원한 것이 없고, 나의 강함은 더 큰 강함에게 잡아먹히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리하면 결론적으로 나는 죽을 것이다.
진화는 우리에게 옆집 개와 동일한 어미를 지녔다 말하며, 바퀴벌레와도 동일한 아버지를 둔다 말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도 하찮은가 반문해본다.
그러한 태도의 종말은 우리 스스로가 동물원으로 걸어들어가게 만든다. 인간도 하나의 동물이니 그리하여야 한다 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것이 동물 보호이며, 세상의 정의가 바로 서는 양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우리의 몸을 소우주라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천체 물리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몸은 우주의 주요 원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우주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프렉탈 구조의 소우주라는 어려운 말도 한다.
그것들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작은 우주로서 나는 고귀하다. 내 몸이 바퀴벌레와 모체를 함께 하는 동물이 아닌, 소우주를 담고 있는 신비로운 존재이니 말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떠한 것이 진리이냐. 과학적 증거가 어떤 것이냐와는 다른 문제이다. 진화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다가는 내 인생이 너무도 허무하고, 보잘 것 없어져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 의식에 선택한 나의 것이기도 하다.
세상은 믿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누군가의 충고나 강요여서는 안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여서도 안된다. 내 안에 내가 바로 설 수 있는 나만의 소우주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