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씨는 나와 태어난 날이 2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김지영 씨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만났던, 짝꿍이었고, 같은 반 급우였으며, 같은 학번 동기이자 같은 회사의 동료였다.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이 책을 읽으며, 성차별 이슈를 굉장히 작은 범위로만 인식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그리고 회사에서 지금까지 받아왔던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희생과 차별대우로 마련된 혜택이었구나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으니 나도 그 악습에 동조한 것은 아닌가 라는 반성이 일었다. 많은 부분 느낀 점이 많지만, 김지영 씨의 언니 김은영 씨의 아래 이야기에서 가슴이 철렁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물끄러미 보셨다. 모서리가 많이 낡은 지도에는 초록색과 파란색 하트 스티거가 몇 개 붙어 있다. 김은영 씨가 가 보고 싶은 나라에 미리 표시해 놓자며 다이어리 꾸미려고 산 스티커를 김지영 씨에게 준 적이 있었다. 김지영 씨는 미국, 일본, 중국 같은 익숙하고 많이 들어 본 나라에 스티커를 붙였고, 김은영 씨는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에 스티커를 붙였다. 왜 거기 가고 싶냐고 묻자 김은영 씨는 한국 사람이 적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도 스티커의 의미를 알고 있다.
김은영 씨는 북유럽 국가들에 가고 싶어 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한국 사람이 적을 것 같아서...
이 대답 하나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음을 느꼈다. 뭐가 바뀌었으면 좋겠고, 어떤 게 개선됐으면 좋겠고 가 아니라 그냥 벗어나고 싶은 것. 그게 현재를 사는 현실의 단면이 아닐까 싶었다.
김지영 씨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출산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고 있어 알지만, 어린아이들은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결국 부부 중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그 한 사람은 당연히 김지영 씨였다. 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상은 예전과 달라졌고 달라진 일상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예측과 계획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내 아내 역시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김지영 씨가 아내와 정확히 오버랩됐다. 왜 한국에서 육아의 주체는 엄마가 될 수밖에 없는 걸까? 왜 여성만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일상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최선을 다해서 도와야지 라고 생각하는 내 마음속에도 결국은 육아의 주체가 엄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던 건 아닐까 씁쓸했다. 아니 미안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김지영 씨와 남편 정대현 씨를 상담한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정신과 의사 역시 부인이 김지영 씨와 비슷한 경험이 있어 김지영 씨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거밖에 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김지영 씨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와 같이 일하는 상담사 이수연 선생은 최근 결혼 6년 만에 어렵게 아이를 가졌는데,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았다. 몇 번 유산 위기를 넘긴 이수연 선생은 '일단'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 사건을 접하며 정신과 의사는 한 두 달 쉬면 되지 굳이 이렇게 까지 하나 싶어 언짢았다가, 그 후에는 몸이 아프네 애가 아프네 하면서 번거롭게 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지 싶다는 생각을 한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 이야기를 읽으며 이게 현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정신과 의사와 같겠구나란 생각도 들었다. 깨달음과 실제적 행동은 다르다. 모두가 깨달음에서 끝나고 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변화되는 건 없다.
82년생 김지영 씨 이야기를 더 나눠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어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온라인에서 함께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떤 목소리를 내며, 어떤 행동을 이어 갈 수 있을지.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