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야자 시리즈] 야자 Free pass

kyslmate(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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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일부는 앞의 에세이에서 이어집니다.


 축제를 한 주 앞둔 그 날, 저녁 식사 후에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가 교실 뒷문 쪽에 나타나서 내게 고갯짓을 했고, 나도 고갯짓을 하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우린 선선한 가을 공기가 들어찬 바깥 교정으로 나갔다. 평소에 우린 운동장 둘레 길을 두 바퀴쯤 돌고 다시 들어오곤 했다. 여유 시간은 딱 그 정도였다.

 그 날도 우린 두 바퀴쯤 돌며 대화를 했다.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되기 5분쯤 전이었다. 곧 종이 칠 것이었다. 밖으로 나와 있던 애들,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던 애들 모두 황급히 건물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한 무리의 학생들이 거꾸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미술부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손에 든 페인트 통을 운동장에 내려놓고, 엄청나게 큰 흰 천을 운동장 바닥에 깔았다. 그건 국가대표 축구 경기 때 가끔씩 등장하는 대형 태극기 정도로 컸다. 미술부는 대형 걸개에 학교의 상징인 말을 그려 축제 때 학교 건물에 건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밖에 나와 있던 다른 학생들처럼 건물 쪽으로 걷고 있다가, 가만히 멈춰 서서 미술부가 흰 천을 운동장 바닥에 펼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더 정확하게는, 그 친구가 멈췄고 나도 따라 멈추었던 것이다. 밖에 나와 있던 애들은 이제 거의 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학교밖엔 미술부원들과 우리만 남았다. 곧 야간 자율 학습 시작을 알리는 종이 칠 것이었다. 난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다. 그간 학습된 두려움도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종이 친 후,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되면 교실 밖은 함부로 나다닐 수 없는 장소로 변한다. 흡사 잔인한 괴물이 활보하는 공간이나 방사능 오염으로 생물이 숨 쉴 수 없는 곳처럼 금지된 공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공포 영화엔 그런 인물들이 꼭 등장한다. 몇 시가 넘으면 그곳에 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나갔다가 최후를 맞이하는 어리석은 인물 말이다. 이제 곧 종이 치면, 그 어리석은 인물의 대열에 나도 포함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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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나면, 교실 이외의 장소는 괴물이나 마녀가 출몰하는 금지된 공간으로 변한다.

 “좀 둘러볼래?” 그에겐 조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 난 당황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 한 번 둘러보자.”

 그의 말엔 어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고 싶으니까, 그래야 한다는 식의 당위만 있었다. 그때였다. 야간 자율 학습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주사위는 던져지고 말았다. 이제 이곳은 금기를 깬 어리석은 인간들이 최후를 맞는 장소로 변했다. 나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 절대로 돌아다녀서는 안 되는 곳 말이다.

 그의 “괜찮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석했다. 우리가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교실로 돌아가지 않아도 걸리지 않을 거라는 의미인지, 걸려도 까짓것 괜찮다는 의미인지를 말이다. 나로서는, 후자는 ‘괜찮다’는 범주에 넣을 수 없었다. 어떤 의미의 ‘괜찮다’인지 결론 내리지 못한 채, 난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미술부 애들이 흰 천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색 말을 그릴 참이었다. 그건 우리 학교의 교포이기도 했고, 학교 재단 기업의 브랜드 상징이기도 했다. 미술부원들은 시작 전에 잠시 모여 몇 마디를 나누더니, 각자 맡은 말의 부위로 흩어져서 작업을 시작했다.

 조금 후에 그가 천천히 움직이자, 나도 움직였다. 언제나처럼 그 시각 교실에선, 나처럼 남은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평소처럼 시간을 보낼 것이었다. 내 앞엔 전혀 다른 시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단지 5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우린 아주 자연스럽게 학교 곳곳을 누볐다. 마치 Free pass를 받은 사람처럼 말이다. 드럼 소리가 나는 기숙사 건물도 기웃거려보고, 전시회 준비가 한창인 도서관 홀에도 가보았다. 우리 둘은 유령과 같았다. 학생들은 이리저리 분주하게 오갔고, 우린 그 사이를 느릿느릿 움직이며 축제를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주위를 얼쩡거리는 우리를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 어느 학년의 자율학습 지도 선생님과 마주치기도 했다. 선생님은 우리를 주목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실제로 그 순간 우리들은 유령이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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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을 보는 것과, 유령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기분

 우리도 축제를 준비하는 동아리의 일원이었다. 우리 동아리 이름은, ‘걷기부’다. 이왕이면 전문적인 냄새를 풍기는 게 좋겠다. 우리 동아리는 ‘마사이 걷기부’다. 우리가 축제를 위해 하는 일은, 동아리에 속한 아이들이 축제를 준비할 때 그걸 지켜봐 주는 역할이다. 그래, 그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축제에선 화려한 스테이지에서 결과만 선보이지, 그 과정은 묻히기 때문이다. 미술부원들이 커다란 페인트 붓을 들고 말의 각 부위로 흩어지던 장면이나, 문예 부원들이 시나 짧은 글이 적힌 종이를 액자에 밀어 넣기 위해 액자의 뒷판을 떼어내던 장면이나, 이름 모를 한 부서가 도서관 열람실에 모여 잡담을 지껄이던 장면은 아무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유령처럼 떠돌던 우리 마사이 걷기부원들만은 그들이 가위로 오리고 남은 종이 같은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8시가 되어 야자의 첫 번째 타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쳤다. 우린 그제야 학교 순례를 마치고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로 돌아간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아무도, 내게 어딜 다녀왔는지 묻지 않았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람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오히려 나의 작은 일탈을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까 걱정했던 게 민망했다. 축제를 일주일 앞둔 학교 시스템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어쩌면 애초에 내가 두려워하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운 나쁜 몇몇만 걸려드는 시스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자 시작종과 함께 작동되는 교실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나, 금지된 공간은 나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였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를 계속 받아들이다보면 그 당위는 내 속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한층 더 강력한 사슬로 나를 옭아매는 것이다. 우린 모두 실제보다 더 강력한 사슬에 묶여 있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사슬로 말이다.

 축제 전야제는 노래 자랑대회와 공연 동아리들의 공연으로 채워졌다. 그 날 만큼은 전교생이 야자 대신 운동장으로 몰려나와 축제 기분을 만끽했다. 무대 위엔 삶의 한 장을 다른 색으로 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학우들이 있었다. 그들의 무대가 성공했든, 실수했든, 아니면 실패했다고 여기든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필연적으로 달성되었다. 축제와 관련된 삶의 이야기는 무대 이전, 일주일, 어쩌면 그 이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평상시와는 완전히 다른 색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령처럼 그들 곁에 맴돌던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 역시 그들로 인해 이렇게 그 날의 페이지를 다른 색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축제 일주일 전에 들떠 있었던 나는, 정작 주말동안 이어지는 축제가 시작되었을 때, 축제 분위기에 들뜨지 않았다. 대신 일주일 전 유령처럼 야자시간에 온 학교를 자유롭게 배회했던 기억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일주일 전엔 축제일을 기다리며 설렜다면, 정작 그 날엔 일주일 전을 떠올리며 설레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축제일의 성과라고 하면, 미술부가 혼신의 힘을 들여 그린 대형 걸개그림을 본 것과, 문예부에서 누구의 작품에 동전이 가장 많이 붙어 있는지 확인한 것, 도서관 열람실에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던 이들을 어묵 파는 임시 가게에서 다시 보았다는 것 정도다. 예쁜 여학생과 눈이 맞는 상상은 역시나 실현되지 않았다.

 축제 일주일 전날, 경계를 넘도록 해줬던 그 친구는 그 후로도 한동안 간간이 나를 찾아왔고, 함께 교정을 거닐었다. 그러다가, 언제인지는 모를 시점에 그는 나를 찾아오지 않기 시작했고 그걸로 짧은 산책을 하던 일과는 끝이 났다. 무엇이든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 후로 2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어떤 관계는 혜성처럼 가까워졌다가 긴 꼬리를 남기고 다시 멀어진다는 걸 경험했다. 더 이상 지속되는 않지만 그렇게 가까웠다가 멀어진 관계들이 삶을 색다른 페이지로 만드는 원료가 된다는 것 또한 경험해왔다. 무엇이든 끝이 있지만, 무엇이든 그냥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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