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아이들
스승의 날을 맞아, 재작년에 가르치고 졸업시킨 아이들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같은 중학교에 다니거나, 예전에 친했던 단짝들과 함께 삼삼오오 우리 반으로 모여들었다. 2년 동안 자란 키만큼 마음도 훌쩍 컸겠지.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자기 학교 교복을 의젓하게 갖춰 입었다. 중2병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질환으로 인식되고 있다지만, 다행히 이 아이들은 비켜간 것처럼 보였다.
남학생 중 하나는 요즘 랩을 맹연습 중이란다. 고등학생이 되면, 고등학생들이 나와 랩을 겨루는 <고등래퍼>라는 프로그램에 나갈 거라고 주변 친구들이 말해준다. 내게 랩을 들려주려고 연습했다는 얘길 다른 친구들이 하는데, 본인은 막상 하려니 쑥스러운지 손사래를 친다. 달리기를 잘해서 운동회 계주 대표를 도맡아 하던 걸 빼고는 특별히 튀는 구석이 없었던 아이.
“나중에 네가 TV에 나오는 것도 볼 수 있는 거야? 야,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주변 사람들에게 네 자랑을 맘껏 해야지!”
늘 유순하고 친구 관계도 좋던 한 남학생은, 함께 있었던 시간 내내 2년 전보다 더 묵직하고 밝은 미소로 나를 바라본다. 아 이 녀석, 아들 삼고 싶다. 미소만 봐도 든든하다.
나를 찾아오기 전에, 찾아뵙겠다고 전화했던 한 여학생은, 6학년 생활 내내 내성적이어서 학급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지내던 아이였다. 그때는 일부러 말을 붙여도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는데, 함께 어울리던 친구 둘과 함께 오면서 그 아이가 나서서 내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 내심 신기했다. 나와 만나서도, 학교생활을 편하게 이야기하고, 자주 웃었다. 난 생각했다. 아이들은 내가 보지 못한 시간, 보지 못한 곳에서도 자기가 선 자리에서 뿌리를 박고 양분을 흡수하며 이렇게 자라나는구나.
사과 속에 든 씨앗이 몇 개인지는 알 수 있어도, 씨앗 속에 든 사과는 몇 개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지금 만나는 아이들의 성장과 결실의 가능성은, 나와 만나는 시간 속에서 미처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다. 2년이 지나서 만난 아이들을 보며 가장 깊이 깨닫게 되는 점이다.
든든한 반장이었던 여학생은, 이번 중간고사에서 2점짜리 하나를 틀려서 올백을 놓쳤다는 얘길 한다. 그 말투엔 잘난 체하거나, 흔히들 말하는 ‘재수 없는’ 태도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제가 이렇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며 그저 옛 선생님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이 여학생은 1학기 때는 별로 두각을 드러내지 않다가, 학급 중심 활동이었던 토론 수업을 하면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2학기 때 반장이 되었다. 토론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다.
2년 전엔, 지금보다 벌인 학급 이벤트가 더 많았다. 어떤 아이의 편지엔 교실을 벗어나서 가졌던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좋은 것만 기억해줘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 속을 썩이던 녀석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1년 동안 지지고 볶았지만, 학년 말에 그 녀석과 나는,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마음의 손을 붙잡았었다. 녀석이 주도해서 졸업식 전날에 열어준 굿바이 파티를 아직 잊지 못한다. 그 아이가 구심점이 되어 준비했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그 아이가 선도부가 됐단다.
“야, 너 선도 받기만 할 줄 알았더니, 선도하는 사람이 된 거야?”
내가 대단하다고 말하니, 같은 학교에 다니는 반장 아이가 말한다.
“그거 하려는 애들 별로 없어서 손만 들면 다 돼요. 큭큭.”
“뭐, 그래도 선도부하면 바르게 행동하려고 더 노력할 거 아니야?”
“그래 그렇지! 넌 왜 그렇게 삐딱하냐.” 녀석과 반장이 티격태격한다. 2년 전엔 늘 보던 풍경이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함께 온 그룹별로 모여 앉아 있다. 남학생과 여학생은 서로 어울리려고 들지 않는다. 내가 사회자처럼, 야 여학생들 오랜만에 봤는데 더 예뻐진 거 같지 않냐? 야 남학생들 키도 더 크고 우람해지니까 멋지지? 뭐 이런 말들을 한다. 별 반응이 없다. 생각해보니,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중2한테 이성끼리 서로 치켜세워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결국 나의 사회는 무리수였다.
아이들은 한참을 떠들고,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인사하러 왔다 갔다 하다가 돌아갔다. 아이들이 한 번 왔다 가면, 지금의 내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 난 어떤 선생님인지, 훗날 나를 아이들이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에 대해서 말이다.
스승의 날을 없애자는 목소리
‘스승의 날’을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올해는 특히 교사들 사이에서 그런 분위기가 많이 감지된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스승의 날’을 폐지하자는 청원이 여러 건 올라와 있고 대부분 현직 교사들이 올린 청원이다.
지난달에 한 초등학교 교사가 올린 청원은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서명했다. 청원을 올린 정성식 교사는 다음과 같이 청원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이하 4.26일자, ‘스승의 날 폐지 靑청원 교사 “잠재적 범죄자 취급, 마음 불편” 동아닷컴 기사 내용 참고)
“교사에 대한 정부기관과 우리 사회의 인식은 여전히 ‘촌지나 받고 있는 무능한 교사’라는 인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권침해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고, 언론의 교사 때리기가 도를 넘고 있다.”
“스승의 날은 유래도 불분명하고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없앴다가 만들기도 했다. 우리 헌법이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도록 하고 있지만 정작 교사는 교육의 주체로 살아본 적이 없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 법)은 건전한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필요하다. 그렇지만 국가의 과도한 해석으로 교사들은 ‘스승의 날’에 더욱 이곳저곳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스승의 날 전날, 국민권익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사에 대한 카네이션 선물은 학생 대표 등만 줄 수 있다… 캔커피의 경우 어떤 학생이든 선물해서는 안 되며, 학생대표가 아닌 일반 학생의 카네이션 선물은 한 송이라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청탁금지법에 어긋난다.”
사실 나도 그렇지만, 요즘 이런 것들을 받고 싶어 하는 교사는 없을 것이다. 아이가 모르고 꽃 한 송이를 가져오기라도 하면 돌려보내야 하고, 학교에서는 학생 대표가 카네이션을 전달하는 행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교사들의 의견도 묻는다. 생일잔치에 당사자에게 초를 꽂을까 말까를 결정하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민망한 상황이 펼쳐진다. 우리 학교는 압도적으로 그 행사를 하지 않는 걸로 결정했다. ‘스승의 날’은 교사에게나, 학부모에게나 부담스러운 날이 되어 버렸다.
‘스승의 날’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촌지 받는 교사에 대한 기사와 교육계의 미담 기사가 올라온다. 미담보다는 어두운 면에 눈길이 더 간다. 스승의 날은 나쁜 교사를 때리는 날이 되곤 했다. 어느 조직, 어느 사회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주 나쁜 사례도, 아주 훌륭한 사례도 전체에서는 일부분이다. 상징적인 날에 쏟아져 나오는 어그러진 교육자들의 행태들은, 대다수의 평범한 선생님들을 숨죽이게 만든다.
스승의 날 전날에 한 고등학교 교사가 또 다른 취지로 스승의 날 폐지 국민청원을 올렸다. ‘스승’이 없는 스승의 날은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권 추락을 청원의 취지로 밝힌 그 교사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다.
“교육 현장에 스승이 없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온종일 엎드려 자는 학생을 보고도 흔들어 깨울 수 없다. 신체 접촉은 성 문제로 빌미 잡힐 수 있다.”
“선생님에게 험한 욕설을 퍼붓고, 기물을 부수는 등 난폭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는 학생일지라도 손 하나 댈 수 없다. 체벌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 학생의 인권은 당연히 소중하고 존중돼야 하지만 교사의 권위가 실종된 학교에서 학생의 인권 존중이 무슨 의미냐. 교사의 인권은 어디서 찾아야 하느냐.”
‘스승’이라는 말은 교사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붙여 주는 칭호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에 교사를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전통적인 의미의 스승은 이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사회는 ‘스승’ 노릇할 생각 하지 말고, 아이들 무사히 졸업이나 시키고 대학이나 보내라고 요구한다. 학부모들 중에는 교사를 서비스업 종사자쯤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교사들도 ‘스승’의 대접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을 바랄 뿐이다.
두 가지 맛이 교차한 스승의 날
올해 ‘스승의 날’은 내게 달콤 쌉싸름한 두 가지 맛이 공존하는 초콜릿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아이들과의 달콤한 시간과, ‘스승의 날’ 폐지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쓰디쓴 현실.
서운함과 부담감 때문에 그 날을 없애버려야 할지, 그나마 작은 따뜻함이라도 나누기 위해 서로의 부담감을 감수해야 할지에 대해선 앞으로도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내 안에서도 이렇듯 의견이 나뉘는데, 사회에서야 오죽할까.
스승의 날엔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의 성장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교사로서 나의 성장도 돌아보게 된다. 교사도 허물이 많은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선생은 없다. 가르치고 배우면서 어제보다 오늘이 좀 더 나은 교사가 되어 간다. 교사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고 변화한다.
교사는 끝끝내 얻지 못할지도 모르는 ‘스승’의 고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사회는 ‘스승’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이상적인 잣대로 교사를 함부로 재단하는 걸 경계해야 할 것이다.
모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민폐 day가 되어버린 ‘스승의 날’은 어쩌면, ‘블랙데이’나 ‘빼빼로데이’처럼 불특정한 사람들만 기억하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어떤 물고기가 하천에 보이면 하천의 물이 좋아졌음을 알게 된다. ‘스승의 날’은 이런 물고기인지도 모르겠다. 모두에게 편한 날이 된 ‘스승의 날’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때 비로소 교육계엔 여러 주체들이 서로에 대한 불신과 서운함을 거두고 존중과 존경이 풍성한 생태 환경이 도래했음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