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 초에 신○○ 국회의원실에서 내려온 공문을 배부 받았다. 국회의원의 자료 요구가 다 그렇듯, 그 공문도 [긴급]이라는 제목 머리말을 달고 왔다. 학교에 비치된 농구공의 개수를 브랜드별로 정리하여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자료 요청 공문엔 보통 그 자료가 필요한 이유는 단 한 줄도 나타나 있지 않았지만, 그저 요구하는 자료를 정리하여 보내면서, ‘아, 국회의원님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에 쓰시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다.
체육 업무를 맡고 있는 나는 농구공의 현황을 파악하고, 기안을 작성하려고 하던 중에 이런 국회의원 자료 요구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안 작성을 멈추고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 교사 단체가 수시로 내려오는 국회의원의 자료 요구가 국회법 위반 소지가 있음을 문제 제기하고, 그걸 바탕으로 국민 청원도 올렸다. 청원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국정감사나 청문회가 열리는 중에는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각종 자료 제출 요구로 이를 처리하는 행정기관들은 업무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심지어 ‘교육관련 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정보공개가 되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을 다시 요구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이런 요구에 응하느라 때로는 수업마저 파행을 겪기도 합니다.
매우 공감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이것에 대해 한 번도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저 국회의원이 달라고 하니, 국가의 중요한 일이겠거니 하고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해 왔던 것이다. 그 단체가 문제 제기한 본론은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행정은 법치주의를 원칙으로 합니다. 보고, 서류 등의 제출 요구 또한 관련법에 근거해야 합니다. 국회법에는 국회의원들이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절차를 상세하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국회법 제128조에 따르면 개별의원이 자료 제출 요구를 할 수 없습니다. 본회의, 위원회, 소위원회 의결로 이를 요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청문회, 국정감사, 국정조사와 관련된 서류 등도 재적위원 3분의 1이상이 요구로 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분별한 자료 제출 요구를 막기 위한 입법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조항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누구 의원, 누구 의원이 개별 의원실에서 수시로 학교에 자료를 요구했던 그 일이 국회법 위반일 수 있다는 문제 제기였다. 이 청원을 많은 교사들이 인지한 시점에, 신○○ 의원실의 ‘농구공 현황 자료 요구’가 왔고, 목적도 이유도 불분명한 이 자료 요구에 대해 여러 선생님들이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 한 선생님이 국회의원 보좌관과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화를 했다.
선생님은 먼저, 농구공 현황 파악 자료 요구가 어떤 법을 근거해서 이루어졌는지 물었다. 보좌관은 관련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농구공 현황은 왜 조사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브랜드의 농구공에서 유해 물질이 검출되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선후가 틀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관련 부처에서 해당 농구공에 대한 사실을 공표하고 학교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선 아니냐,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서 한 방 터뜨리는 것이 더 중요한 거냐고 하니, 보좌관은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난 미력하나마 이 문제 제기에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구공 현황 자료를 정해진 기한을 넘기기까지 보고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교감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교육청에서 독촉 문자가 왔다는 것이다. 난 교감선생님께 여차저차해서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니 좀 두고 보자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교육청 담당자가 연락이 오면 그렇게 답변하겠다고 했다. 교감선생님은 완전히 납득하신 거 같진 않지만, 알겠다고 말씀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공문을 배부한 곳은 ‘교육청’이고, 학교들의 자료를 취합하는 곳은 ‘교육지원청’이었다. 이런 문제 제기는 배부한 곳이 아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아무 것도 모른 채 자료 보고가 늦은 학교를 원망하고만 있을 ‘교육지원청’에 자료를 보내놓고,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히, 어제 신○○ 의원실에서 자료 요구를 철회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원실에서도 무분별한 자료 요구가 관련 기관 담당자들의 업무를 가중시키고, 요구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문제 제기에 공감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평소에도 국회의원의 긴급 자료 요구가 있지만, 국정 감사 기간만 되면 학교나 공공기관 및 기업에는 각종 자료 요구가 빗발친다. 자료 보고의 기한은 당일 몇 시까지, 혹은 다음 날까지로 매우 촉박하다.
그런 공문이 내려오면 담당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허둥지둥 자료를 찾는다. 단순한 현황 조사면 그 과정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지만, 그런 자료 요구가 여러 건이거나 지난 몇 년 치 자료를 요구하는 경우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떤 공공기관에선 감사 기간엔 밤중에도 자료를 요구하는 통에 몇 일간 퇴근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국회의원의 중요한 의정 활동 중 하나인 국정감사에 공공기관들은 협조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공익을 위한 일이기에, 국회의원이 정부를 견제하고 감사하는 일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문제는, 국회의원들의 자료 요구가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다든가, 본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자료 요구가 아니라 의정 활동 생색내기용 요구가 많다는 점이다.
해당 문제의 국민 청원 내용처럼, 좋은 목적도 좋은 과정을 통해 달성해야 한다. 입법 기관인 국회에서는 자료 요구도 법 절차를 지켜 해야 마땅할 것이다. 국민을 위해서 애쓰고 자료도 모으는 것일 테지만(그렇게 믿고 싶다), 분별없는 자료 요구로 인해 공공기관 담당자의 행정 업무가 지연되거나, 학교 선생님들이 해야 할 일들을 못한다면,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누군가도 결국 ‘국민’이다. 절차의 위법성을 따지기 이전에, 꼭 필요한 자료만 요구하겠다는 의원실의 각성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해를 입을지 모르는 어떤 국민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번 일로 깊이 깨달은 것 하나는, 문제 의식 없이 해오던 일이 문득 부당하게 느껴진다면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 없으면, 목소리 내는 사람을 응원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크든 작든 목소리를 낼 때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