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질투는 나의 힘

kyslmate(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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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대초,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을 냈던 시인 기형도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여러 시인들을 소개한 어떤 책을 통해서였다.

 기형도, 1960년에 시작되는 그의 연보는 1989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3월 7일 새벽.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다. 사인은 뇌졸증. 만 29세, 독신.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음.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 묘지에 묻힘(본명 그레고리오)."
-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중에서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요절한 그의 이력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면 그저 ‘기형도’라는 요절한 시인 하나가 있었구나, 하고 지나쳐 버렸을 것이다. 같은 책에 소개된 '빈집'이라는 시가 그를 기억하는데 중요한 이미지가 되었다.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입속의 검은 잎.jpg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총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파트에선 시종 무거운 분위기 풍긴다. 두 번째 파트엔 사랑을 노래한 시들이 더러 있다. 시들의 공통점은 시인의 일상과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일상의 이미지들과 자잘한 사건들과,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저 관념으로 그치는 시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 경험적 이야기의 묘사 혹은 재구성이, 아이러니하게도 관념적인 시보다 오히려 더 난해하게 다가온다. 경험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라 공감되지 않으면, 그 어떤 인문학적 명제보다 어려울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들 중에서 관념적이라서 오히려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를 하나 소개한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탄식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는 시인의 고백에 마음이 뜨끔하다. 이것이 내 청춘의 자화상이 아닌가.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라는 말은 역설적이다. 지나간 세월을 되짚어보니, 질투로 인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고, 삶 속에 몇 안 되는 그 역동성만이 희망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2

 2002년에 이 시의 제목만 딴 것이 분명한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 개봉했다. 박해일, 배종옥이 주연을 맡았다. 박해일은 착실한 대학원생이다. 그는 유부남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자신에게 애인을 빼앗아 간 유부남(문성근)을 우연히 만나게 된 그는 호기심으로 문성근이 편집장으로 일하는 잡지사에 취직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사진작가 배종옥에게 빠져들지만 이미 배종옥은 문성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질투심이 폭발한 박해일은 배종옥에게 매달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 당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었다. 박해일이 질투로 인해 망가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질투는 나의 힘.jpg

 질투는 역시 힘이 세다. 꼿꼿하고 성실한 한 사람을 밀어 넘어뜨릴 수 있다. 의연한 사람을 대책 없이 화내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어른스러운 사람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내가 질투를 했던 기억을 되짚어본다. 질투가 얼마나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었던가, 얼마나 수많은 ‘불면의 밤’을 양산했던가. 몸에 밴 의연함도 질투 앞에선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 힘의 차이는 확연하다.

3

 대학 3학년 때 국어교육과 내에서 창작분과 활동을 했었다. 분과 활동으로 한 학기 동안 시를 나누기로 하고 분과원들은 3개조로 나뉘어 각기 다른 시집을 정하여 읽었다. 각기 기형도, 안도현, 백석의 시를 읽고 그들의 시집에서 하나의 시를 차례로 뽑아 함께 감상을 나누었다.

 내가 속한 조는 기형도 시집을 선정했고, 우리는 <질투는 나의 힘>을 발제 시로 정해서 함께 감상했다. 물론 시인과 시 선정엔 내 입김이 많이 들어갔었다.

 <질투는 나의 힘>을 놓고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열 댓 명의 분과원들이 과방에 둘러 앉아 시 감상을 나누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참 풋풋하고 낭만적인 시간이었다. 서로의 감상에 귀를 기울이다 감탄하고, 또 자신의 차례가 다가올 때 설렘과 긴장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십 수 년이 지나서, 난 그 시간 속에 있던 나를 질투한다. 시인의 시는 내 삶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질투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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