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떠올랐던 생각인데, 어제 찬호께이/미스터 펫의 <스텝>에 대해 쓰는 와중에 다시 생각이 나서 한번 주절거려 봅니다.
<스텝>은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에 SF적 요소를 가미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설이라는 문학이 가지고 있는 서사적 재미가 기본적으로 '추리'라는 과정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넓게 보았을 때 저는 모든 소설이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아무튼 장르로서 추리소설에만 집중해서 이야기 해보았을 때 추리소설에 SF소설이 성공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별의 계승자> 처럼 하드 SF이면서도 추리소설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가미한 작품도 있지만요.
SF와 추리소설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작품의 SF적 세계관에서 다루고 있는 과학기술의 현상과 원리를 독자들에게 쉽고 간명하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발전된 과학기술을 이용한 트릭을 접하게 되면, 이건 독자의 입장에서는 추리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이해 불가능한 마술이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여겨지게 되죠. SF 세계관을 택할 경우 독자에게 충분한 정보량을 줄 것인가, 라는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명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쓰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가 독자들이 충분히 따라 올 수 있을 만큼 어렵지 않거나 , 아니면 작 중에서 충분히 독자들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전제까지 따라 붙는 셈입니다.
사실 SF 세계관이 아닌 <명탐정 코난>만 보더라도 일반 독자들은 도저히 알리가 없는 기상천외한 과학 지식을 등장시키면서 트릭을 해설하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명탐정이니까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지만 그런 경우 보통 독자들이 추리하는 재미가 없어지죠. (사실 코난을 '추리물'로 재미를 느끼고 보는 분은 별로 없겠지만...) 현재의 범죄에 대한 과학수사대의 리포트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마당에, 미래 기술을 다룬 SF 세계의 과학수사라면... 독자들이 더 이해하기도 어렵고, 작가도 정말 탐정을 설명충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이야기를 재밌게 끌어가기 어렵겠죠?
예를 들어서, 많은 SF소설, 특히 스페이스오페라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 우주선의 행성 간 차원도약의 예를 들어봅시다. 대부분 상대성 이론을 들먹이면서 차원 도약이란 단순히 거리를 짧게 하는 것이 아니라 평행 세계에 위치한, 다르지만 그 내용은 같은 차원으로의 이동임을 설명합니다. 작중 인물들은 차원 도약을 통해 A - B - A 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A - B - A' 로 이동한다는 것이 주된 설명 패턴이죠. 여기서 A와 A'는 매우 닮은 공간이지만 이론적으로는 평행 세계의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냥 SF 소설이라면, 이러한 원리를 설명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차원도약의 원리를 이용하여 추리 소설적 트릭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소설가는 한편으로는 차원도약의 원리를 이용해 트릭을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들이 이러한 트릭에 대해 공정하게 추리할 수 있도록 힌트와 복선을 제공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트릭에 쓰인 과학기술적 원리가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넘어가 버린다면, 그것은 추리소설로서는 썩 성공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지죠. 역으로, SF소설과 추리소설을 결합한다고 했을 때, 현실과 세계관에서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이용한 추리 트릭을 선보이지 않는다면 사실 굳이 이야기의 배경이 SF일 필요도 없고, SF소설로서도 그 매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밀폐된 우주선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트릭이 우주 공간이라는 배경의 특색이 살아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중력 살인 트릭이라도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러한 트릭을 정합성 있게, 또 독자에게 힌트를 주면서도 독자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죠. 그래서 SF와 추리소설이 성공적으로 결합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작가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