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추리소설 중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작품들은 '경찰소설'입니다. 경찰소설이라면, 주인공/탐정 역이 그냥 경찰이라고 해서 다 경찰소설로 분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찰소설은 일견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정말 재미있는 지점은 경찰 조직이라는 관료 집단에 대한 묘사와 비판에 있다고 봐요. 추리소설의 천재적인 탐정들은 멋들어진 추리로 사건을 해결하면 그만이지만, 경찰소설의 경찰들은 항상 주어진 권한의 한계와 경찰 조직 내의 관료적 다툼의 압박 속에서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습니다.
유명한 일본 드라마, <춤추는 대수사선>으로도 널리 알려졌듯 일본의 경찰 조직은 국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공무원 그룹인 캐리어조와 말단 순사부터 시작하는 논캐리어조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국의 경찰 제도가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적 형태라면, 일본은 자치경찰 제도로 운영하고 있죠. 그 소속이나 예산, 운영에 있어서 지방자치 단체에 묶여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다보니 수도와 지방, 지역과 지역 간에 경찰들의 알력도 적지 않은 편이라 합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현장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보신에 급급한 고위층 엘리트들을 현장의 형사들이 통렬하게 비판하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모습은 일본 경찰소설의 클리셰처럼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 역시 일본 경찰소설인데요, 다카무라 가오루, 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 등 경찰소설의 대표주자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올 해 저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것은 '곤노 빈'의 <은폐수사> 시리즈였습니다. 시리즈라고 하기엔 민망하게도, 한국에는 아직 두 권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요.
앞서 얘기했듯, 논캐리어/지방/일선 형사가 현장에서 시원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일본 경찰소설의 대다수 작품들과 달리, 곤노 빈의 <은폐수사> 시리즈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보통 경찰소설에서 비판의 대상인 '높은 분', 바로 캐리어 출신의 경찰청 간부 류자키 신야가 작품의 주인공이거든요. 류자키 신야는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어낸 도쿄대 법대 출신의 캐리어 경찰입니다. 가족의 일은 모두 아내에게 맡겨두고 직장에 몰두하는 40대 중반의 워커홀릭이기도 하구요.
류자키 아저씨는 참... 요새 주인공 치고는 좀 답답한 인물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긴 하지만, 자신이 국가 관료로서 국가에 헌신하는 만큼 아내는 집안 일에 충실하고 내조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딸은 어떤 대학을 나오든 간에 결혼만 잘하면 되지 않나 생각하구요. 또, 자신이 그랬듯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도쿄대에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일류 사립대에 합격한 아들에게는 재수를 강요하는 성차별주의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동창이자 캐리어 동기이지만, 사립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은 경찰 간부인 이타미를 은근히 깔보고, 어차피 세상은 엘리트들에 의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엘리트주의자입니다. 또, 요새 어린 애들은 부모가 오냐오냐 키워서 엉망이라고 생각하는 꼰대이기도 합니다. 경찰소설에 등장하는 재수 없는 캐리어 경찰의 요건을 갖춘 전형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죠.
그런데 한편으로, 류자키 아저씨는 다른 '높으신 분'들과 달리 자기 보신에 집착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합니다. 류자키는 공무원은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원칙과, 경찰은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합리성을 갖췄습니다. 비리나 부패, 나태한 태도와 선을 긋고 성실하게 경찰 업무에 임하는 꼬장꼬장하면서 유능한 엘리트 관료, 그게 바로 류자키의 모습입니다. 경찰 조직 내부의 불필요한 권위주의나 파벌 싸움에 신경 쓰지 않고, 설령 자신에게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경찰로서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관철하는 것이 류자키의 신조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관료가 이렇다면야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럴리가 없기 때문에 그동안 성공가도를 달려온 류자키에게도 큰 풍파가 닥쳐오게 됩니다. 경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원칙을 강조하는 류자키.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고 방치했던 가족 문제에서도 큰 위기가 닥쳐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놓은 류자키. 힘내라 공무원....!
<은폐수사> 시리즈의 즐거움은 바로 이 류자키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따라가는 재미에서 옵니다. 이제까지의 경찰 소설이 현장 형사들에게 초점을 맞췄다면, 은폐수사 시리즈는 흔히 '윗선'으로 불리우는 경찰 간부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경찰 조직 내의 문제들을 더욱 본격적으로 조망합니다. 물론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가 대표작 <64>를 통해 현장 형사가 아닌, 경찰서 홍보과장의 입장에서 경찰 이야기를 그려낸 바 있지만, 그 조망 지점은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 64>의 주인공은 현장 출신의 홍보과장으로 형사과에서 '떠난 사람' 취급을 받는 처지였다면, 류자키 신야는 그냥 출신부터 엘리트인 경찰청 고위 간부입니다. 물론 속편인 <수사의 재구성>에서는 좌천 되긴 하지만, 그래 봤자 도쿄 도내의 경찰서장, 그 지위 만으로도 지역 유지 급입니다. 워낙 높으신 분이라 사건 자체만 봤을 때 계급 때문에 꿀리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
이 재수 없지만 원칙적인 주인공은 사실 작품 내에서 펼쳐지는 본격적인 범죄 사건에서는 좀 떨어져 있는 위치지만, 자신의 원칙과 합리적 판단을 통해 사건 이면의 또다른 사건들에 대응해 나가게 됩니다. 조직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나름 분투하는 류자키를 보면, 자연스럽게 이 '원칙 있는 보수주의자'에 대해 감동하게 됩니다. 마치 클린트 이스트우드 작품을 볼 때 느껴지는 감동이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특히, 애니메이션은 애들이나 보는거라면서 아들을 타박하던 이 중년 아저씨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감동을 받아 마음가짐을 다잡는 장면은 이 시리즈의 주요한 감상 포인트 중 하나입니다 ㅎㅎ
아쉽게도 곤노 빈의 작품들은 한국에서 큰 인기가 없었는지, 모두 절판인 상태입니다ㅠㅠ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참 전에 시리즈 4편이 나오고, 또 외전까지 나왔다는데 한국에서는 3편 소식도 찾아보기 어려운 듯 합니다ㅠㅠ
곤노 빈은 일본에서 드라마화도 된 유명한 작가라는데, 좀 재밌는 점은 1989년에 일본 참의원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원자력 발전이 필요 없는 사람들' 이라는 정당에 참여해서 선거에 출마했었다고 하니, 지금 일본의 상황을 보면 선견지명이 있는 작가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사실 곤노 빈 뿐 아니라 아시베 다쿠 처럼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탈핵 운동에 참여한 미스터리 작가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또 따로 글을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곤노 빈, <은폐수사> 알라딘 링크 -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7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