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추리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이번에는 SF 소설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만, 사실 이 소설 역시 SF소설이면서 추리소설인 그런 작품입니다. 하하;
제가 요 몇년 간 가장 주목하고 있는 작가는 홍콩 소설가인 '찬호께이'입니다. 기본적으로 홍콩 소설가입니다만, 대만의 추리소설 공모전에서 수상하기도 하고,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 거장 시마다 소지(이 분의 작품에 대해서도 조만간 이야기해볼 생각입니다 ^^)의 이름을 딴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도 수상하면서 아시아권 전역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작가입니다. 저는 찬호께이를 <13.67>이라는 경찰소설을 통해 처음 접했는데요, 홍콩이라는 도시의 현대사와 도시 공간에 얽힌 이야기들을 경찰소설의 틀 속에서 잘 살려낸 걸작이라,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다른 작품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도 그럭저럭 재밌는 작품이었죠. 한국에서도 나름 잘 팔리는지, 계속 찬호께이의 작품들이 한국에 출판되고 있네요. 당장 이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해보다가, 바로 오늘 새 작품이 발간된 것을 알고 매우 좋아하고 있는 중입니다 ^^
그런 찬호께이가 대만의 추리소설가이자, 마찬가지로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 수상자인 '미스터 펫'과 함께 공저한 작품이 오늘 이야기할 <스텝>이라는 작품입니다. 두 작가 모두 중화권의 장르소설 작가일 뿐 아니라,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관련 업계에서 일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등장한 아주 재밌는 설정의 작품이 바로 이 <스텝>입니다.
이 작품은 AI를 통한 범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 범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교도소의 중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사회에 복귀했을 경우 재범률을 시뮬레이션하는데요, 단순히 기존 데이터를 토대로 통계를 내는 것을 넘어서서, 개개인 범죄자가 출소한 이후에 발생할 가능한 엄청나게 다양한 시나리오들을 토대로 언제, 어디서 다시 범죄가 벌어질지 까지 예측합니다. 이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시뮬레이션을 통한 재범 가능성에 따라서 범죄자의 형량이 결정되는 '형량 평가제도'가 실시된 근미래 사회가 바로 이 작품의 배경입니다.
이 설정을 보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데, 바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세계하고 비슷하죠? <마이너리티 리포트> 역시 예언자들을 통한 범죄 예지 시스템을 통해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을 미리 체포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예언적 능력을 통해 잠재적 범죄자를 체포한다면, <스텝>에서는 AI 기술을 통해 시뮬레이션을 하고, 이미 체포된 범죄자에 대한 형량을 정한다는 점이 있겠죠.
<스텝>에서는 이처럼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위한 데이터로 범죄자의 배경과 심리 분석 결과 뿐 아니라 이들이 복귀할 지역 사회의 환경과 인물들에 대한 정보까지 포괄하여, 여러 변수를 대입한 수천수만번의 가상 시뮬레이션을 통해 재범률이 높은 범죄자들은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제도가 미국에서부터 시작 됩니다. 중범죄가 줄어들었다는 통계가 그러한 제도의 시행을 뒷받침하죠. 그리고 미국에서 이 제도가 성과를 거두면서, 일본에서도 이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죠.
그러나 당연하게도, 인간의 위험성을 미리 판단해 사회에서 격리시킨다는 발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이 제도의 실시에 반대하는 세력이 암약하게 되고, 완벽하게만 보였던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허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소설은 새로운 시스템이 처음으로 도입된 미국의 에피소드들과, 미국에서 등장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영향을 받은 후속 사건들이 벌어지는 일본 에피소드, 이렇게 두 파트로 나뉩니다. 여기서 미국의 에피소드들은 찬호께이가, 일본 파트의 이야기는 미스터 펫이 맡아서 공저했다고 하네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영화화 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범죄를 저지를 것이 예정된 사람을 체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미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 문제, 더욱 깊이 나아가자면 '예방전쟁' 등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나름의 메시지를 던졌다면, <스텝>에서 던지는 질문은 좀 더 단순한 편입니다. 인간의 주체성과 변화 가능성에 대한 고전적 믿음을 밀고 나가는 작품이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의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AI를 통한 범죄 예방 시뮬레이션이라는 것 자체가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요즘 시기에 딱 맞는 소재일 뿐 아니라, 이 범죄 예방 시뮬레이션에 꼭 필요한 데이터들이라는 것이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하여 큰 이슈가 된 미국의 '프리즘 프로젝트'와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등장하거든요. 정보 기술의 발전이 감시 국가와 연결된 한 단면을, 소설을 통해 제대로 드러내고 있달까요.
그뿐 아니라 두 작가가 중화권 작가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우리는 작가들이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중국에서 도입하고 있는 '사회신용시스템'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겁니다.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이란, 간단히 말해서 국가가 국민들의 법과 규정에 대한 준수 실적, 이를 넘어서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있는지, 가정에 충실한지 등의 윤리적 태도, 더하여 온라인에서의 활동까지 하나하나 점수를 매겨서 평가하고, 이에 따라 국민을 통제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아주 충격적인 시스템이니, 이 기회에 아래 링크의 글을 통해서 도대체 중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작품의 배경과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작품의 내적 재미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를 해볼까요? 두 사람의 작가가 한 작품을 공저했다고 하면 저는 일단 그 작품이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가지고 전개되는지 의심하곤 합니다. 몇 번 당한 적이 있어서-_-;; 특히 이와 같은 SF 세계관의 소설은 무엇보다도 작품 내의 세계관이나 인물 설정, 이야기의 개연성 등이 통일적이지 않으면 재미가 살아나기 어렵죠. 그런데 이 작품은 두 명의 작가가 서로 파트를 나누어 집필했다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균일한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사실 저는 읽으면서 서로 파트를 나눠 썼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거든요. 심지어, 번갈아 가며 등장하는 미국 파트의 이야기와 일본 파트의 이야기는 서로 이전 에피소드의 떡밥들을 해소하면서, 독자의 머리를 꿍꽝꿍꽝 울리게 만듭니다. 두 사람의 협업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솜씨라 할 수 있죠. 게다가, 두 작가 모두 정보통신공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범죄 예측 시뮬레이션에 대한 설정이나 기술적 설명이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세밀하다고 느낄 만 합니다.
다만, 이야기 전개가 다소 혼란스러운 일본 에피소드들보다는 미국 에피소드들이 더욱 실감나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느껴지긴 합니다. 이건 찬호께이가 더 솜씨 좋은 작가여서인지, 아니면 각 에피소드 별로 작품의 전체 구성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달라서인지는 모르겠네요. 일본 파트의 이야기들이 복선을 회수하기 위해서 급하게 마무리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그런 와중에서도 추리소설적 재미를 살리기 위한 장치들이 꽤나 흥미롭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 찬호께이와 미스터 펫의 소설들을 계속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강초아 님의 번역도 상당히 깔끔합니다. VR 시스템 내에서의 살인 사건을 다룬 미스터 펫의 <버츄얼 스트리트 표류기>도, 이 작품도 상당히 IT 기술 쪽의 이야기들이 있다보니 매끄럽게 번역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 싶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잃지 않고 맛깔나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작중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좀 혼란스러운 편인데, 헷갈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좋은 번역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 재미나게 읽은 찬호께이의 <13.67>에 대한 글도 조만간 쓸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이번에 나온 신작 <망내인>도 훌륭한 작품이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ㅎㅎ
아산정책연구원 : 조지 오웰의 악몽: 중국의 사회신용시스템
찬호께이/미스터 펫의 <스텝> 알라딘 링크 -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22535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