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달아 추리소설과 관련한 글들만 올리니 제가 추리소설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 오히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장르는 SF에 가깝고, 일반적인 추리소설 애호가들 아끼는 추리 문학의 황금기 시절에 쏟아져 나온 고전 명작들은 읽은지 하도 오래 되어서 기억도 잘 안나는... 그런 불성실한 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쩌다보니 2017년에 재밌게 읽게 된 추리소설들이 많아서 주절주절 좀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추리소설의 재미는 어디에서 올까요? 물론 추리 소설 자체가 독자와 작가의 대결과 같은 형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독서 경험보다 더 몰입감 있고, 긴장감 있는 책 읽기가 가능한 것은 당연하겠죠. 저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재능이 없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수학 문제를 몰입해서 풀다보면 느껴지는 쾌감 같은게 있었습니다.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쾌감에 가까워지는 경험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재밌는 추리 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사건 자체를 구성하는 탁월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탐정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게 중요합니다. 따라서 추리소설을 쓴다는 것은 지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죠. 잘 쓴 추리소설은 그 자체로 재밌는 캐릭터극입니다. 셜록 홈즈와 왓슨을 주인공으로 하는 수많은 드라마들이 계속해서 변주되면서 등장하는 것을 보세요. BBC 셜록, 물론 재밌는 드라마였습니다만 그 재미 중 상당수가 코난 도일의 매력적인 캐릭터 조형과 캐릭터 간 관계 설정에서 나왔음을 부인하기 어렵죠. 다른 소설들 보다 추리소설에서 수십년 간 회자되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겁니다.
그리고, 장르문학 대부분이 사실 그러하겠지만, 추리소설은 특히 미스터리 장르 애호가들이 읽고 또 창작하는 분야입니다. 장르적 특징이 보통 작품 내 세계관 차원에서 구현되는 판타지, SF, 무협 등과 달리 추리소설은 추리소설이 지켜야할 고유의 규칙들이 작품 내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엄격하게 지켜지는 편이며, 그렇다는 것은 역으로 익숙한 요소들이 많은 작품들에서 반복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익숙한 요소가 반복될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식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반복'이 표절로 느껴지지 않고 오마쥬나 패러디로 느껴질 수 있도록 잘 변주되어야 합니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는 단지 작품 내적인 감상 뿐 아니라 그러한 변주가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가 평가하고, 원본과 비교해보는, 일종의 장르 애호가의 즐거움이 따라옵니다. 이를테면 최근 제가 소개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을 보면서, 단순히 작품 자체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엘러리 퀸을 이렇게 패러디 했구나, 라거나 같은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인 노리즈키 린타로와 이런 점에서 비슷하구나, 라거나. 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고 평가하는 일종의 오타쿠적인 즐거움을 느끼기 좋은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추리소설은 일종의 윤리적 딜레마나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기에 좋은 장르라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추리소설들이 살인 사건을 다루게 되는데, 물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온갖 범죄와 연쇄살인에 나서는 범인 캐릭터들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범인들은 모종의 강렬한 동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복수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든. 살인이라는 용서 받지 못할 행위와 개인의 강렬한 동기 사이에서 쉽게 판단 내리기 어려운 윤리적/사회적 딜레마들이 작품 내에서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등장합니다. 평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넘어갈 주제들에 대해서, 추리소설은 살인이라는 자극적이고 강렬한 소재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죠. 일전에 제가 말했듯이, 일본의 사회파 미스테리들이 이러한 방향에서 범죄 자체의 사회적 성격에 대해서 고민하도록 하죠.
저는 이런 재미들 때문에 추리소설이 계속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들을 유혹하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한국은 아직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면 꾸준하게 추리소설을 내놓는 분들이 적은 편입니다만, 또 인기있는 드라마들이 이런 추리극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불만 붙으면 한국에서도 추리문학의 황금기가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비밀의 숲> 같은 드라마만 보더라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