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블로그 플랫폼을 새로 시작하니 즐겁네요. 10년 전에는 이글루스 블로그를 정말 열심히 했는데, 언젠가부터 서비스가 이상해지면서 재미를 잃기 시작했고 군대를 다녀오는 사이 전반적으로 블로그 붐이 퇴조하면서 트위터나 페이스북만 했더랍니다. 그런데, 페이스북으로 읽은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는건 단편적이고 짧은 감상 위주로 흘러가게 되더라구요. 좀 읽은 책들에 대해서 정리도 할 겸, 또 소액이지만 STEEM에 투자하고 있는 만큼 플랫폼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해보자는 생각으로 스티밋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어제 쓴 학생 아리스 시리즈 소개 - https://steemit.com/kr/@kyc8394/2017
사실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일본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익숙할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2016년,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의 추리'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 된 적이 있거든요. 나름 인기가 있었던 모양인데, 저는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못보고 있습니다. 한창 <대군사 사마의> 보느라...ㅠㅠ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교토 소재 사립대학의 추리소설 동호회 대학생들의 우당탕탕 추리 모험담이라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전형적인 홈즈-왓슨 설정의 버디가 활약하는 추리물입니다. 홈즈 역의 히무라 히데오는 '임상범죄학자' 라는 타이틀로 교토 소재 사립대학 사회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이자, 그럭저럭 팔리는 추리소설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사건을 의뢰받거나, 사건에 휘말리거나 하는 내용들이 펼쳐집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그냥 대학생들의 이야기라 공권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면,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히무라 히데오는 범죄학자라는 이름으로 경찰의 사건 해결에 많은 도움을 준 바 있기 때문에 작중에서도 범죄 현장에 접근한다거나, 경찰을 시켜 일을 처리한다거나, 경찰들에게 사건을 의뢰받는다거나 하는 일이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그만큼 사건의 강도가 '학생 아리스'보다는 좀 센 편입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탐정 에가미 지로에 대한 찬양을 신나게 한 바 있는데, 사실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탐정인 히무라 히데오 조교수님이야 말로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주인공으로 훨씬 캐릭터가 잘 잡혀 있습니다. 아니, 그야말로 정통 탐정역에 가까운 설정이죠. 히무라 히데오는 젊은 시절부터 대학 근처의 하숙집에서 세를 들어 살고 있으며, (베이커 가의 홈즈와 허드슨 부인?) 고양이를 세 마리나 기르는 집사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헤비 스모커라는 점인데, 작품 내내 카멜 담배를 엄청나게 피워댑니다. 마치 홈즈 처럼 무술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작품 내에서 격투 씬이 벌어지면 대활약하기도 합니다. 교수님인 만큼 각종 지식에 통달해서, 사건에 숨겨져 있는 은유나 비유들을 정확하게 추리해냅니다. 완전 사기 캐릭터죠?
히무라 히데오의 버디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역시 정통(?) 왓슨 스타일의 인물입니다. 아무래도 현역 추리소설 작가인만큼, 아리스 역시 사건에 봉착했을 때 이러저러한 추리들을 내놓는데, 히무라 히데오는 그 추리들을 논리적으로 박살내면서(....) 경우의 수를 줄여나가죠. 히무라 히데오를 이길 수 없다, 라고는 생각하지만, 내심 어딘가 라이벌 의식과 함께 히무라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는 양면적인 왓슨 역 특유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추리소설 작가 답게 각종 밀실 트릭에 통달하여, 사건에 대해 잘 설명해주는 친절한 왓슨이기도 하죠.
히무라와 아리스의 투닥투닥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주 귀엽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커플을 강하게 지지하는 부녀자 분들도 적지 않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ㅎㅎ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엘러리 퀸에 아주 빠져있는 작가입니다. 데뷔작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 1부 제목부터가 Y의 비극을 인용하여 '월광게임 ~88' Y의 비극~' 이라는 제목이죠.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서 이러한 엘러리 퀸 덕후 경향은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엘러리 퀸이 <로마 모자 미스터리>, <그리스 관 미스터리>, <이집트 십자가 미스터리> 등 여러 나라 이름을 붙여서 작품을 내놓은 바 있는데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장편들 역시 이를 오마쥬 하여 <러시아 홍차의 비밀>, <브라질 나비의 비밀>, <말레이 철도의 비밀> 등의 이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마쥬는 엘러리 퀸에 그치는게 아니라, 작품 중에서는 무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작품인 <주홍색 연구>와 동명의 장편도 있습니다. 저 같으면 욕 먹을까봐 간 떨려서 이렇게 못할 것 같은데 말이죠-_-;;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아직 몇 권 안되는 것에 비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일본에서 단행본만 스무 권이 넘게 나왔을 정도로 장편, 단편집, 중편 등 다양한 작품이 존재합니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아직 절반도 채 소개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작품 수가 많은 만큼 작품의 퀄리티 역시 약간 들쭉 날쭉한 감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즐겁게 읽은 작품을 추천드리자면, 장편으로는 <46번째 밀실>과 <말레이 철도의 비밀>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6번째 밀실>은 히무라-아리스 콤비가 첫 데뷔하는 작품으로, 어느 겨울 추리소설계의 원로 작가이자 거장인 '마카베 세이치'의 저택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콤비가 초대 받으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침 크리스마스 연휴인 지금 시점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밀실 트릭의 대가로 이름난 마카베 세이치의 저택에 초대된 추리소설가들과 편집자들.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거장은 밀실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거장이 숨겨두고 있었던 환상의 46번째 밀실 트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46번째 밀실 트릭으로 인한 살인 사건인지 밝혀내가 위한 히무라의 추리극이 펼쳐집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공정한 단서를 제공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품이라고 보기엔 어렵다는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 소설가들이 한 곳에 모인 장소에서 밀실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밀실 트릭과 관련한 여러 지식들이 펼쳐지며, '피의 크리스마스 파티'가 그려지는 그 분위기가 뭐랄까, 우리가 추리소설이라고 했을 때의 클리셰들을 재밌게 살려내고 있어서 읽을 맛이 나는 작품입니다.
<말레이 철도의 비밀>은 아직까지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된 '작가 아리스'의 국명 시리즈인듯 합니다. 말레이 철도의 대형 사고로 시작하여, 어느 일본인 이주민 가족에서 일어난 비극들을 복기해 나가는 히무라-아리스 콤비의 모습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사건 해결에 있어서 비행기 시간이라는 일종의 타임 리밋을 설정해놔서, 과연 이 시간 제한을 뚫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긴장감이 있구요. 특히 경찰과의 관계에 있어서 히무라의 홈그라운드였던 일본 관서 지방이 아니라, 먼 이국의 낯선 여행자 입장에서 사건에 도전하는 것은 '작가 아리스' 시리즈를 꾸준히 읽어온 입장에서 좀 더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최근에 정발된 작품이자, 일본에서 본격 미스테리 대상을 수상한 작품인 <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도 개인적으로는 재밌었습니다만, 그 설정이나 배경이 좀 작위적인 느낌이 납니다... 다만 작중에서 일본의 서브컬쳐 산업에 대해 장광설이 펼쳐지는데, 한국의 정부 주도 컨텐츠 산업 육성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으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들을 쭉 소개했는데, 무엇보다도 이 작가의 장점은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소재를 잘 끌어온다는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배경 설정이 탁월하다는 건데, 흔한 미스터리 사건으로 만들 수 있지만 설정들을 겹쳐서 쌓아올려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월광 게임>은 화산 폭발이라는 소재로 클로즈드 써클을 만들어서 재난 상황의 추리극이라는 흥미로운 분위기를 만들었고, <쌍두의 악마>에서는 종유동굴과 폐쇄적인 예술인 마을을 결합시킵니다. 사이언톨로지를 연상시키는 종교집단을 가져온 <여왕국의 성> 역시 마찬가지고, 인간복제라는 소재를 가지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낸 <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이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의 유니크한 삶을 소재로 한 <달리의 고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러리 퀸의 팬이자, 신본격 미스테리의 기수 중 한 사람인 만큼 사건을 구성하는 능력도 뛰어납니다. 물론 이건 좀 아니다 싶은 트릭들도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논리적 추론에 기반하여 사건을 풀어나가는 전개가 합리적인 편입니다. 그런데 큰 단점이 있다면, 사건의 원인이 되는 범행 동기들이 너무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별 기괴한 이유로 사람을 죽여대는 추리물들이 적지 않지만(옷걸이를 던졌다고 사람을 죽이는 명탐정 코난의 에피소드도 있으니,)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단점은 복선 없이 동기가 등장하는 작품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레이 철도의 비밀> 같은 예외도 있지만, 많은 작품들이 억지로 동기를 구성한 것같은 느낌이라 재밌게 읽다가 마지막에 허탈해질 수 있습니다. <46번째 밀실>도 아주 재밌게 읽다가 마무리에서 좀...ㅜㅜ 아니면 너무나 뻔한 동기를 제시해놓는다거나. 사실 사람이 사람 죽이는데 유달리 굉장한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단편 작품들도 적지 않은데, 개인적으로는 단편들 보다는 장편들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배경 설정이 탁월하다는 장점이 단편보다는 장편에서 더 잘 구현되기 마련이니까요. 아무튼,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저에게만 재밌는 작가가 아니라 여러 분들에게도 추운 겨울 따뜻한 전기 장판에 누워 귤 까먹으면서 즐길 수 있는 작가라면 좋겠습니다 ㅎㅎ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첫 작품 <46번째 밀실> 알라딘 링크 -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46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