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같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아이가 보지 않을 때 공에 접착제를 발라 바닥에 고정시킨다. 아이는 공을 몇차례 밀어보지만 공은 더 이상 굴러가지 않는다. 아이는 아주 서럽게 울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다시 공이 구르는 모습을 보여주저야만 한다. 아이는 울먹거리며 직접 공을 몇번 굴려보고, 공이 다시 정상적으로 구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울음을 그친다. 그날에 B가 느낀 감정은 이 굴러가지 않는 공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의 감정과 비슷하다. 당연히, 감정은 그 감정을 유발한 사건의 객관적인 중대함과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
B는 그를 만나는 날을 기다려왔다. 그도 B를 만나는 날만을 기다려왔다. B와 그는 몇달 전부터 일주일에도 몇번씩이나 그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B가 출발하기 직전에도 그는 B와의 약속을 꼼꼼하게 조율했다. B는 그가 그날이 완벽할 수 있도록 얼마나 신경 쓰는지를 느낄 수 있었고, 편안함을 느꼈다. 어느새 긴장감은 해소되고, 기대감도 사라졌다. B는 더 이상 기대할 필요가 없었다. 보통, 내일 해가 뜬다는 사실을 기대하진 않는다.
B가 약속장소에 도착했지만 그는 없었다. 그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B는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히 일어나야 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B에게 그가 아픈건 아닐까, 오는 길에 사고라도 당한건 아닐까하는 걱정이 찾아왔다. 하지만 순수한 걱정이었다. 그 걱정은, B를 괴롭히진 않았다. 그가 아프든, 사고를 당했든 B가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한나절을 기다리고 돌아가서 마침내 그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했다. 그는 약속시간 전에 낮잠을 잤는데, 어린 아이를 안고 있다가 갑자기 팔에 힘이 풀리면서 아이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고 한다. 중간에 깼지만 B에게 전화를 하진 않았다. B는 혼란스러웠다. 몇달을 기다린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단순히 졸려서 깨트린 것도 이해하기 어렵고, 걱정할 것이 뻔한 자신에게 전화를 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잔다고 못 나왔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이유도, 꿈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B에게는 다양한 감정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가 겪은 일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기절하듯 잠들었으며, 꿈을 꾸고 화들짝 놀라서 깨어났지만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B에게 연락하기 위해 전화기를 향해 기어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고작 낮잠을 잔다고 약속을 깨뜨렸다고 하면 B가 화낼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B가 이해하길 바라며 그는 최대한 상세하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