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을 쓰기에 앞서 준비시간이 길다. 키보드 앞에 앉으면 반나절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백지를 쳐다본다. 그러다 문장을 쓰기 시작하는 것 같다가도 그 문장을 맺지 않고 다시 지워버린다. 그렇게 지워지는 문장들은 완전히 지워지는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간다. 머릿속에서 그 쓰다 만 문장들은 서로 얽혀서 하나의 문장이 되기도, 이어지기도 하고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대체하기도 한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전투가 마무리 되고 고요해지는 순간이 오면 나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고요하게 가라앉은 문장들을 실시간으로 해체하고 조립하며 글을 이어나간다. 마치 생각과 타이핑이 경쟁하듯 일어난다.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내가 지금 무엇을 쓰는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문장들을 쏟아내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번득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손을 놀리는 속도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어느 한쪽이 주도적인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글은 둘 사이의 경쟁이다. 한순간에는 어느 하나가 앞서도, 이내 한쪽이 추월한다.
나는 모든걸 잊고 내가 가용할 수 있는 내 안의 모든 에너지를 글에 쏟고 있는 그 순간이 즐겁다. 내 삶의 고뇌를 모두 잊고 몰입하는 그 순간이 즐겁다. 하지만 요즘은 그러지 못 하고 있다. 키보드 앞에 앉아 있는 순간이 괴로워서 도저히 타이핑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다. 다짐을 지키기 위해, 준비하던 것을 할 수 있도록, 매일 키보드 앞에서 하루를 보내지만 성과는 없다. 그리고 성과가 없음이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되어서 다음 날의 나를 괴롭힌다. 그 끊임 없는 고통의 순환 속에서 나는 속 시원히 타이핑을 하며 괴로움을 잊을 기회도 없다.
어제는 잠을 자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푹 잘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밖에 나갈 기운은 없었는데 다행히 집에 남은 술이 있었다. 확실히 술을 마시니 쉽게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술을 마시진 말아야 한다. 그렇기에 냉장고에 남은 술은 없지만 마트를 다녀오며 술을 사오진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는건 좋지만, 그렇다고 불면의 밤을 보내고 다시 다음 날도 괴로울 뿐이라면 술을 마시느니만 못 할 것이다. 단순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그치지 않아야 한다. 괴로움을 잊고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은 글을 써야만 했다. 시간의 흐름도 잊어버리고 몰두해서 글을 써야한다.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깊게 고민하다보면 다시 고뇌가 찾아온다. 고뇌가 나를 쫓을 수 없도록 의식을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손가락을 쉬지 말아야한다. 키보드를 박살낼 기세로 두들기며 괴로움을 잊어야 한다. 글의 내용은 아무래도 좋다.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상관 없다. 목적만 달성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분을 고양시키는 음악을 찾아 틀었다. 헤드셋 볼륨을 최대로 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렇게 주억거리다 보니 정신이 조금은 맑아졌다. 그리고는 타이핑을 시작했다. 의미는 없지만 목적은 뚜렷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과 의식은 경쟁을 벌였다. 때로는 손가락이 이기고, 때로는 의식이 이겼다. 승자 없이 멈춰있는 시간도 물론 있었지만, 그 빈 시간은 음악이 메워주었다. 덕분에 고뇌할 시간은 없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글을 쓴다는 글을 썼을 뿐이지만 마음이 많이 평안해졌다. 내일도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