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글 아닌 글을 쓰고 싶었다. 머리를 비우고, 그냥 살아있음을 기록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록이라는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단순히 살아있음 이상의 무언가를 담아야 할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일어난 일들을 나열하는 것으로는 2018년 4월 20일의 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고로 기억을 잃었을 때, 2018년 4월 20일에 무엇을 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내 기억을 찾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했던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었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쓰고 있는 이 이상한 글이, 오히려 더 나를 제대로 기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은 빠르게 흘러,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사과문에 대한 문단을 쓰고 있었다. 그 문단은 필요했을까? '아무 글 아닌 글'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목적이 뚜렷한 글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을까? 예전에 화자가 없는 말, 청자가 없는 말에 대한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청자로서 나는, 고고한 시선을 가진 화자를 좋아한다. 대중들의 시선보다는 화자 자신의 시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메세지를 전달하는 화자들이다. 그래서 화자로서의 나도, 나 자신의 시선을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 자신의 시선을 전달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청자는 내 시선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화자가 뚜렷해지면 청자는 화자의 메세지를 알아보기가 어렵고, 화자가 모호해지면 청자는 메세지를 알아본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수필들을 생각했다. 참 묘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수필들은 사실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감정은 최대한 배제되어 있고, 철저히 객관화 된 수필들이다. 그리고 나는 철저히 객관화 된 그 글들에서 화자를 뚜렷하게 느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아무리 철저한 객관화를 거치더라도 화자의 고유한 시선이 개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들의 시선을 겹쳐, 객관성을 유지한다고 해도 그 타인들의 선택을 취사선택하는 화자의 고유한 시각이 있다. 화자는 자신을 지킨 것이다. 모호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청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에는 글이 이렇게 흘렀다. 내가 좋아하는 화자들과는 다르게, 나는 나 자신을 모호하게 만들지 않고도 청자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 한다. 그래서 광인의 낙서에 가까운 글을 남기게 되었다. 아무 것도 아닌 글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단순히 내가 살아있음만을 기록하기 위한 방법도 모르겠다.
그래도 참 신기한 순간이다. 나는 항상 글을 쓰기 전에는 준비가 필요했다. 글에 대한 예의라고 할까? 이 글은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누워서 빈둥거리다가 쓰는 글이다. 스팀잇에 온 뒤로 300일이 지났고, 지금 쓰고 있는 글은 200번째 포스트다. 300일만에, 200번만에 나는 처음으로 누워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글을 시작했다. 나는 이 사실을 우연히 알았지만 묘하게도 상징적이다.
미쳤냐구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