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속은 깊이 사귀어야 알 수 있다고 한다. 겉모습에서 드러나는게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겉은 차가우나 속은 누구보다 따뜻할 수도 있고, 겉으로는 친절하나 속에는 칼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진짜 겉모습이 있다. 감추지 않은, 무방비의 겉모습은 속을 그대로 내비친다. 나에게 기대하는게 있는 사람, 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사람은 겉모습을 꾸며낸다. 있는 그대로가 아닌 철저하게 계산된 모습을 내비친다. '무언가를 얻어내려는'이라 표현하니 악인처럼 느껴질 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다. 사악한 의도가 없더라도 우리는 겉모습을 꾸민다. '좋은 인상을 남기고 좋은 관계를 갖고 싶어서'를 사악한 의도라고 할 수 있을까? 무언가 대단한걸 얻어내겠다는게 아니라 순수하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쌓고 싶어 겉모습을 꾸며내는걸 사악하다 하기는 어렵다.
무방비의 겉모습은 사람을 담고 있다. 완벽한 타인에게만 내비치는 무방비의 겉모습, 그래서 우리는 '평소 행실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도 한다. 가령 일상적으로 예의가 부족한 사람이 있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없어서 휴대전화를 빌려달라는 행인이 있다고 하자. 나는 기꺼이 그 사람에게 휴대전화를 빌려주었다. 빌린 휴대전화를 들고 멀리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사람은 내 근처에서 통화를 할 것이다. 들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정도는 들린다. "길 가던 분이 빌려주셨어."와 "길 가던 사람한테 빌렸어." 중에 어떤 것이 듣기 좋은가? 존댓말을 꼰대 같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존댓말을 싫어하는 축에 속한다. 그러나 완벽한 타인에 대한 언어는 그 사람의 태도를 드러낸다. "길 가던 사람한테 빌렸어."라는 사람을 예의 바른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사람의 평소 행실을 추측할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은 현실에서는 굉장히 예의 바른 사람일지 모른다. 해외에서 태어나 존대에 익숙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된 순간, 그 사람은 나에게 더 이상 완벽한 타인은 아니다.
언어로 평가하는건 어려웠으나, 행동으로 평가하는건 굉장히 쉬워진다. 내 옆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은 커피잔을 그대로 테이블에 두고 갔다. 출구로 가는 길에 음료를 비우고, 일회용 컵을 버릴 공간이 있으나 그러지 않았다. 음료를 비우는 공간에도 어지러이 컵이 널려있다. 음료도 비우지 않고, 컵을 버리지도 않았다. 컵을 그대로 얹어둔 채로 올려놓은 트레이 하나를 시작으로 번잡하게 널려있다. 깨진 유리창 효과다. 아마 잘 비워진 트레이들이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면 다음 사람의 행동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트레이들을 정리했다. 어지러운 트레이들이 나에게는 글감을 주었으나 카페 점원에게는 불쾌함만을 주리라.
내가 무엇이라고 이 사람들을 평가하는가? 사실 다 잊을 것이다. 이미 그 사람들의 얼굴도, 아니 체형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새겨놓아야 할 일은 이렇게나 쉽게도 겉모습에서 사람의 많은 부분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완벽한 타인에 대한 겉모습조차도 꾸며낸다면 이는 무엇일까?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충동에 반하는 일이 굉장히 어렵도록 만들어져있다. 겉모습을 완벽하게 꾸며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의 겉모습은 더 이상 꾸며낸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횡설수설했다. 가끔은 이렇게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괜찮겠지. 여러분들 모두 평안하게 한주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