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과를 시작한지도 이제 7시간, 주말에 밀린 잠을 보충하여 꽤나 또렷했던 정신은 이미 무너졌다. 눈 앞에 남은 문장은 바로 앞에 쓰인 문장 하나 뿐이다. 지금에서는 왜 제목을 이렇게 지은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조차 모호하다 . 이 문장의 마침표를 쳐다보는 것조차 수시간째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수시간 전에는 그래도 문장들이 있었다. 아, 아마 이것이 지금의 글을 쓰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제야 손가락이 좀 움직인다.
이 여백을 메우던 문장들은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다. 써내려가다보니 며칠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잠시 밖에 나가서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례는 다양한 사실을 시사했다. 주제와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돌아와서 다시 키보드 앞에 앉았다. 글은 이제 내 개인적 경험에서 인간 보편으로 확대된 후 다시 나의 내면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어느 순간 글을 계속 써내려가는게 싫어졌다. 그래서 모조리 다 지워버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문득 장신정신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지워버리고 나온게 지금 쓰는 이 글이라는걸 생각하면 상황에 맞는 말은 아니었다. 1시간전쯤 이글을 계속 써내려갈 이유를 다시 찾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알지 못 한다.
정말 기이한 것이 하나 있다. 지금 이 글을 지워버리고 싶지는 않다. 써내려갈 생각만 했지, 이 글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관심이 없었기에 처음부터 읽어보았다.
여전히 지워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워진 글의 주제는 나 자신의 비합리성이었다. 글은 나 자신의 비합리적 선택에서 시작해서 합리성이 그와 반대의 선택을 강요한다면, 나는 비합리적인 인간으로 남을 것이며, 비합리적인 내 자신이 좋다는 것으로 끝이 날 터이었다. 지금은 지금의 비합리적인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좋지도 않다. 그래서 지운 것인가. 나는 합리적 존재이고 싶었던 것인가.
흔히 매체에서 묘사하길 장인들은 괴팍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남들이 알아보지도 않는 디테일에 화를 내며 도자기를 깨버리는 도공은 아마 대표적인 장인의 이미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꼼꼼함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이 불세출의 명작을 만들어낸다고 여긴다.
사실 장인들은 그저 괴팍한 사람들이 아닐까. 나처럼 그저 이유 없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사람들 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