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글에서 내가 가진 미래상을 살짝 내비쳤더니 노동의 가치가 완전히 상실되고 인간의 힘 없이도 인간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순간에 인간의 목적은 무엇이겠냐는 질문을 하셨다. 삶의 목적, 삶의 이유라는건 인류 역사상 가장 해묵은 고민 중 하나이다. 해묵은 고민이란 신선한 고민이기도 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질문이다. 인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랜 세월 다각도의 시각을 지녔다. 역사에 걸친 인간의 몸부림과 내 사상을 모두 설명하는건 아주 긴 글이 될 것이다. 내 글은 커피 한잔 마시며 정신을 환기시킬 정도의 길이를 지향한다. 최대한 쉽고 짧게 설명하려고 노력함에도 여전히 내 글이 지루하고 어렵다 여기시는 분들도, 설명이 부족한 빈약한 글이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최초의 노력은 형이상에 기대어 인간의 목적을 찾았다. 전세계에 걸친 다양한 신앙이 이를 뒷받침 한다. 영혼, 운명, 업보에 대한 믿음은 비종교인에게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단순히 동물적 생존본능에 기인한 것인지, 가진 것의 박탈에 대한 두려움인지, 죽음 후에 찾아올 공허를 확대해석 한 망상적 공포인지는 쉽게 결론을 내기 어려우나, 지금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형이상에 의존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가장 직선적인 해결책은 죽음의 무게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모든 종교에서 삶의 목적과 죽음에 많은 장을 할애하는건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형이상에 대한 믿음이 희미하거나 없는 나에게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왜 사냐건 웃지요."는 내 삶의 목적을 가장 잘 대변하는 시구다. 우선 시의 해석은 철저히 수용자의 몫이니, 기존에 알고 있던 해석은 잊으라. 우연히 자연주의에 대한 내 시각을 설명할 기회가 있어 글을 인용한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가 혹은 있는 그대로를 자연이라 여기는가는 전통적인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결구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자연을 깔보고 인간이 자연을 초월한 우월한 존재라 여기어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생존본능을 가진 인간이 자연을 활용하는게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러한 시각에서 인간 대 자연의 대결구도를 바라보면 자연을 보호하자는 입장이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된 존재로 여기는 오만한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자연에서 도태되어 멸종하는 종을 보호하고자 하는 인간의 움직임은 과연 자연스러운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있는 종을 인위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게 하는건 유전자 조작과 얼마나 다른가?
인용한 내 사상을 기반으로 시구를 해석해보라. 궤변처럼 느껴지는가? 살아있어서 산다는건 충분한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에게는 더욱 궤변으로 느껴진다.
내가 결정론자라는 사실 또한 나에게 삶의 목적에 대한 질문을 더욱 끌어온다. 자유의지가 허상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잠깐 흔히 허무함을 표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곤충들을 생각해보겠다. 흔히 곤충들의 삶을 빗대어 삶의 덧 없음을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짧은 생애동안 치열하게 우는 매미의 삶이 진정 덧 없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내 삶도 마찬가지다. 내 삶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에 기대는 것도 허무함을 주는건 마찬가지다. 내 삶의 가치는 내 삶의 가치로 충분하다. 오히려 죽음이 완전한 종결이라 믿는게 내 유한한 삶에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하는건 아닐까?
창작물의 등장인물의 삶은 결정되어 있다. 각본가, 감독, 작가에 의해 움직이고 삶에서 중요한 부분,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등장인물에게 자신을 이입하는걸 즐긴다. 그렇다면 오롯이 나만이 주인공인 내 인생이 어찌 흥미롭지 않을 수 있는가? 심지어 내 인생에는 스포일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