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사람이 손해"라는 격언과 "참는게 이긴다"는 격언은 공존한다. 이게 그저 많은 격언들이 상반된 의미를 담고 있곤 하기 때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가령 행인이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하자. 나는 이 때 "참는게 이긴다"를 따르는게 유리하다. 얌전히 길을 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과 말이 통하겠는가? 아마 화를 낸다고 나에게 돌아올 득은 없다. 오히려 적당히 미친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미친 사람이라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다. 화가 날 때 일관적으로 참으라는 격언은 아니다. 참아서 이기는 순간은 일회성인 상황 뿐이다. 무능한 낙하산 직장상사를 계속 견뎌내는게 당신에게 어떤 득을 주겠는가? 매일 당신의 신경을 긁는 직장 동료에게 계속 웃는 얼굴을 내비치는게 당신에게 어떤 득을 주겠는가? 심지어 일회성인 상황에서도 내가 화를 참아서 상대가 득을 볼 때도 있다. 무례한 손님은 득을 본다. 그런 손님에게 화를 내는 점원에게 "인내의 미덕을 지키지 못 했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한다. 결국 두가지 상반된 격언은 철저히 득실을 따지는 격언이다. 인내의 미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시비 거는 행인에게 부당함을 호소하지 않는 것도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참는게 아니라 철저한 득실을 토대로 한 선택이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인내가 해가 된다. 당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서 당신의 억울함을 해소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당신의 아픔을 호소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당신의 상처를 알아보지 않는다. 당신이 누군가와 물리적으로 충돌했다고 하자. 싸움인지 사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상대의 과실로 일어난 일이고 상대에 비해 당신이 더 크게 다쳤음에도 당신이 참으면 아프다며, 억울하다며 바닥에서 구르는 상대방이 득을 본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염증을 느끼는게 이러한 현실이다. 인내는 거대한 미덕이지만 인내는 단순히 한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인내를 위해 인내하고, 인내로 인한 손해를 인내하고, 그러한 부조리에서 고개를 쳐드는 분노를 다시 인내해야하고, 마침내 찾아올 우울함도 인내해야 한다. 심지어 부정적인 상황에만 참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게 아니다. 봉사, 기부와 같은 좋은 일도 마찬가지다. 생색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군가가 알아주길 원해서 좋은 일을 한게 아니지만 반대로 생색내는 사람은 득을 본다. 인내는 또 다른 인내를 낳는다. 생색내고 싶은 우쭐거리는 마음을 누르는 것도 미덕인데, 더 나아가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생색을 내며 득을 보는 사람을 보며 부당함에 대해 항의하고 싶음을 다시 또 억눌러야 한다. 한번의 인내로 상황을 넘기는 지혜는 아주 사소한 상황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 인내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가지 감정만을 인내해야 하지 않는다. 당신의 인생 전체가 무너질 지도 모른다. 아니, 반대로 당신이 한번 인내하지 않아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 한번의 생색, 한번의 분노, 한번의 호소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현실이 바뀌기 위해서는 인류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통찰력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인내하지 않음에 영향을 받는건 인간의 본성이다. 엎드려 통곡하는 사람을 무시하기 어렵다.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무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사람의 편을 들어준 순간 연쇄는 시작된다. 한번의 억울함, 한번의 분노를 참아낸 이는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안겨준 사람이 득을 보는 현실에서 다시 한번 억울함과 분노를 느낀다. 두번째도 참아낼 수 있을까? 세번째는? 네번째는? 그래서 나도 화를 내고 싶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