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태워버릴 기세로 이글거리던 태양도 시간을 이기진 못 했다. 때를 기다리던 가을비가 무더위를 주춤한 틈을 타서 차분하게 내리고나니 열기는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모기조차도 숨어지내던 열기에 더욱 신이 난듯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던 말매미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말매미 소리가 사라진 공간을 귀뚜라미 소리가 매운다.
나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그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눈을 뜨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몸을 일으켜야 한다며 2시간 밖에 자지 않았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찬물로 세수를 하며 강제로 몸을 깨우던 생활과는 정반대다. 그렇게 한시간, 또 한시간을 보내다 보면 오전도 금새 지나간다. 귀뚜라미 소리를 즐기기 위해 오전을 그렇게 보낸 것이 아닌만큼, 귀뚜라미 소리가 사라진 오후도 오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집안일을 조금 하다가 다시 누워버린다. 불어나는 몸집이 신경이 쓰이면 운동을 하고는 책상 앞에 앉는다. 책상 앞에 앉는다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과 다르진 않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다.
어느새 올해도 다 지나간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다. 서지도 못 하던 조카는 이제 뛰어다니는데 나는 그대로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매일 어제를 후회하던 과거가 생각났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잘 살지 못 했음을 후회하던 과거가. 문득 "후회를 후회하지 말자"던 강연이 떠올랐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게 아니라, 후회를 통해 성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 어제에 대한 후회도 막연한 후회는 아니었다. 내일은 어제보다 잘 살겠다는 다짐도 이어졌고, 그럼에도 매일 후회한 것은 더 잘 살아야 했던 내일, 잘 살고 있었던 것 같은 오늘이 어제가 되니 부족한 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후회, 귀뚜라미, 계절의 변화 같은 생각을 하니 베짱이와 개미가 떠올랐다. 과연 베짱이는 겨울이 다가오며 노래를 부른걸 후회하고, 혹 겨울을 견뎌내낸다면 그 다음 해에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노래하는걸 그만둘까?
이런 별 영양가 없는 생각들을 하다보니 오후도 다 지나간다. 내일도 그냥 이렇게 흘려보내긴 싫다. 오늘은 이제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또 누워서 귀뚜라미 소리나 듣겠지만, 내일은 꼭 뭐라도 해야겠다. 아마도 책을 읽겠지. 항상 책이 만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