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동물과 야생동물들의 삶을 비교하면 현대인과 문명의 관계가 보인다고 합니다. 태어나길 야성을 지니고 태어나, 그 야성을 잃으면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는게 자연입니다. 개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늑대에서 개량된 종으로, 처음에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능력을 지녔던 개들은 썰매를 끌었고 사냥을 보조했고 위험을 감지했습니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과 함께 개에게 기댈 필요가 줄어든 인간에게 개의 기능보다 생김새가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마침, 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위적인 진화, 즉 품종개량에 대한 지식이 늘어났던 인류는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합니다. 19세기만 해도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지고 있던 닥스훈트는 이제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짧은 다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독은 자연분만도 어려운 종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연에서는 금새 멸종하거나 살아남아더라도 인간에 의해 얻은 형질들을 내려놓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수렵, 채집을 통해 살아남는 종입니다. 농업혁명이 지난지도 정말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인간은 아직까지도 곡물에 적합한 소화기관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농업혁명 이후 곡물 위주로 바뀐 인간의 식습관은 이전에 없던 다양한 질병들을 가져왔습니다. 이를 토대로 자연스러운 식습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문명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있으니 자연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확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연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착취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착취자의 후손입니다. 지배계층에 비해 피지배계층이 많았던건 사실이지만, 피지배계층에 속하더라도 착취하기 위한 하위 계층은 존재합니다. 포식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는 포식자보다 빠를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뒤에 뒤쳐지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처럼 살아남는다는 행위는 희생량을 낳습니다. 자연에서 생존이란 기만하고 착취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자연에도 이타적인 행동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이타적인 행동조차도 집단을 구분하여 행합니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작위로 사진을 보여주고 어느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겠냐고 묻는다면, 본능적으로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아내어 이를 택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간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란 웰-빙을 상징하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자연성의 회복을 내세우며 문명이 인간의 삶을 해치고 있다는 주장도 자주 언급되지만, 자연성의 회복이란 야만으로의 복귀입니다. 자연은 약육강식에 충실합니다. 문명이 사라진다면 수세대조차 견디지 못할 형질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도태될 것입니다. 나 또한 그 중 하나이지요.
그렇다면 자연성에서 벗어나서 이룩한 문명이 인간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과 긍정적 영향 중 과연 어느 것이 크게 느껴지나요? 나는 오히려 자연성에서 벗어나서 더욱 철저한 인위적인 질서를 수립하는게 인간이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성'이라 부르는건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게 아니라, 문명인이기에 가능한, 종의 본질을 넘어선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끊임 없는 약육강식의 자연에는 없는 자유와 평등입니다.
글을 조금 다듬는다면 좋은 글이 나올거 같은데 며칠간 글을 쓰지 않아 속에 쌓인 글감이 많아서 빠르게 해치우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마감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