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 사는 우리는 통제된 자유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한다. 얼핏 말장난처럼 보이는 통제된 자유라는 개념은, 방종이라는 개념을 통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두가지 축 중 다른 하나인 평등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자유를 보장한다. 하지만 이게 전부였다면 이 주제로 글을 쓸 필요도 없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이해하기 쉽다면 사상가들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 그래서 굶어죽는 사상가가 많은가?
개념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의 공존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유를 침해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은건 평등을 위해 자유가 한발 양보한게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자유의 통제이다. 오히려 양보는 평등이 가진 미덕이다. 평등은 남들보다 뛰어날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 평등은 거기서 한발 물러서서 남들보다 뛰어난 점 없는 사람이 열등한 인간은 아니라며 격려할 뿐이다. 이러한 평등에도 쉬운 설명이 있다. 평등은 동일함을 추구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뛰어날 자유는 굉장히 사람을 어렵게 한다. 운동선수들의 노력을 폄하할 수 없지만 태생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배우나 모델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지 않은 직업이 어디에 있는가? 이타적인 숭고한 행위들을 바라보며 인류가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성에서 벗어난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타적인 행위 또한 능력이며 타고난 능력이다. 이타심에서 남을 돕고자 했지만 능력이 부족했던 사람은 "마음만 앞선 미련한 사람"이라 불리곤 한다. 평등은 항상 양보만 한다.
자, 여기서 결정론 대 자유의지와 본성 대 환경, 카오스 이론과 같은 화두까지 꺼낸다면 어떻게 될까? 자유의지의 범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자유에 대한 관점도 크게 변한다. 결정론에 따라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에 대한 통제는 무엇인가? 결정론에 따른다면 자유라는 개념을 새로이 정의해야 한다. 결정론자들에게도 제각각의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자유라는 개념을 환경에 의해 영향 받지 않을 주체성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결정론적 세계관에서는 주체성 또한 일반적인 정의와 크게 다르다. 일반적으로 주체성은 자유의지와 동일하게 여겨진다. 결정론에서는 주체성이란 자유에 대한 침해의 증거이다. 자유에 대한 침해가 없었다면 인간은 동물적 본성만 가진 존재였다.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키며 끊임 없이 주체성을 침해했다. 부모에 의해 인종이 결정되었으며 국적에 따라 쓰고 읽고 말하고 듣는 언어가 결정되었다. 언어의 구조는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양육이 바꿔놓은 우리의 주체성을 더 이상 나열하는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조금 더 냉소적으로 바라본다면 결정론 하에서는 자유라는 개념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결정론 하에서 타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침해할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그 편이 문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뿐이다.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명을 위해서 자유라는 가치를 추구한다.
결정론은 여기서 머리 아픈 고민을 하나 더 넘겨준다. 결정론자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믿는 이들도 쉽게 동의할 명제가 있다. 인간의 주체성에는 외부적 영향이 절대적이다. 후천론자라면 당연히 동의할 명제이며 순수한 선천론자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잉태부터가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외부적 영향에 따라 주체성이 변하도록 설계된게 인간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자연스레 외부적 영향을 수용하도록 되어있는게 인간이라면 주체성에 대한 침해와 자유에 대한 침해를 동격으로 보기 어렵다. 다시 이전의 문단과 같은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하여도 필연적으로 침해 받을 수 밖에 없도록 설계 되어있다. 이에 대한 적극적인 침해를 지양할 행위로 규명하는 이유는 문명을 위해서이다.
주체성이란, 자유란 허상이라며 생각을 멈추는 것도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살아간다고 믿는 인간에게는 너무 서글픈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주체성에 대한 긍정적인 침해와 착취를 구분하여 이 문제를 도식화한다. 선악을 구분하는건 전통적인 분류법이다. 긍정적인 침해란 바람직한 양육과 교육에 해당한다. 사회에 부합하는 인간상이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하는 문제는 미루어 두고 사회에 부합하는 인간상을 만들어내는 양육과 교육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복잡한 문제는 항상 간단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모든 생명체에게 살아남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의 생존에 기여하는 모든 영향은 긍정적이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착취는 당신의 주체성을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이다. 당신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당신을 이끈다. 이에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세뇌이다. 인간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의 범위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세뇌 그 사이다. 하지만 항상 목적과 행위의 선악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문제를 또 다시 미궁으로 끌어내린다. 가령 내가 당신에게 아주 살갑게 대한다고 하자. 당신은 내 친절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기분이 좋아진 당신은 업무성과가 늘어서 승진을 했다. 결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목적이 당신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면 어떨까? 당신의 능력을 일찍이 알아보고 당신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함이라면 이는 선악 중 어디에 속하는가. 이번에는 반대의 사례를 살펴보자. 부모가 세뇌에 가까운 형태로 자식을 교육했더니 그 자식이 아주 행실 바른 사람으로 거듭났다면?
카오스 이론은 이 난제에 정점을 찍는다. 침해를 피할 수 없으니, 그 중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침해만을 통제한다고 하자. 당신의 존재가 초래할 결과가 부정적이라면 당신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까? 하지만 카오스 이론의 무서움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당신이 태어나지 않는 것으로도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공정하게 이야기하면 당신의 존재는 당신의 부존재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결과와 긍정적인 결과를 동시에 가져올 것이다. 비단 당신의 존재 뿐 아니라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오롯이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거나 오롯이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무엇은 없다. 내가 당신의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당신에게 긍정적인 일이 생길 수 있다. 무엇을 통제하고 무엇을 허가하는가는 이리도 어려운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으로 읽었던 구절을 소개한다. 더 이상 배가 고파서 글을 쓰지 못 하겠다. 배가 고파서 글을 이어가지 못 하고 밥을 먹는건 내 자유인가? 아니면 배가 고프다는 본성의 영향인가? 내가 만약에 이를 참아내고 글을 계속 쓴다면 이는 내 자유인가? 아니면 허기를 참을 수 있는 내 본성의 영향인가? 그저 말장난처럼 보이는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어떤가. 말장난처럼 보이는 문장이 진리를 담고 있기도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