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조선생님@tutorcho께서 쓰셨던 말로 쓰는 일기를 보고 나도 한번 새벽에 산책을 하며 말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 길을 나섰다. 왜 하필 산책을 해야 했는지는 모른다. 집에서 하는 편이 수월한텐데 굳이 산책을 택한 이유는 녹음기 하나만 달랑 가지고 길을 걷는 작가에 대한 낭만이 있기 때문일까?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여러번 해봤고, 여러번 실패했다. 이번에도 다르진 않았다.
말을 하는 걸 좋아한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는 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이다. 독백도 좋아한다. 나는 주로 독백을 통해 인물을 드러낸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도, 영상물을 볼 때도 인물들의 독백을 주의 깊게 본다. 그럼에도 녹음기를 앞에 두고 목소리를 내는건 쉽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말은 구어체와 다르다.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는 문장의 구조를 제대로 갖추어야 하지만, 일상적인 대화에서 말은 자유롭다. 어색한 주술구조도 말에서는 악센트를 조절해서 강조하는 효과를 줄 수 있고 문장을 제대로 맺지 않고 마치거나 연결사 없이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기도 한다. 나는 그런 말의 성질을 사랑한다. 상대가 나를 이해하는 정도가 높다면, 나는 글로 작성하기 위해서는 수시간이 필요할 내용을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들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상대의 이해를 확인하며 설명의 정도를 조절하고, 문법적으로는 옳지 않고 구조적으로는 논리적이지 않은 말들조차도 상대가 이해하는 그 자유분방함에 취해서 떠들고 있는 순간이 즐겁다.
과연 내가 쓸 글을 말로써 작성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사랑하는 말의 성질은 녹음기를 앞에 두고 하는 말에는 녹아있지 않다. 녹음기는 비언어적, 언어적 표현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말을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내거나 고개를 주억거릴 수 없다. 게다가 내가 지금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하는게 아니라 결국은 문자로 표현될 글을 소리내서 읽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계속 떠올라, 내 말은 경직된다. 말이라는 표현법의 의미는 하나도 남지 않고 혼자서 소리 내어 말을 한다는 어색함만 남았다. 그래서 녹음기를 앞에 두고 나는 또 한참을 조용히 있었다.
내가 녹음기를 앞에 두고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던 이유와 내가 만족스러운 대화문을 쓸 수 없는 이유가 같은 것 같다. 말과 문자로 표현되는 인물의 대화문은 달라야 하기에.
꿈 이야기라도 꺼내볼 걸 그랬다는 생각은 한다. 오늘 나는 꿈에서 아름다운 꽃을 보았다. 그 꽃을 꺾어서 선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꽃을 꺾을 수 없어서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누가 후다닥 뛰어와서 그 꽃 꺾었다. 나는 그 순간에 잠에서 깨어났고 귀 옆에서는 모기가 앵앵 거리고 있었다. 나는 왜 잠에서 깨었을까. 모기가 나를 깨웠고, 그 순간의 불쾌한 감정이 내 꿈을 망친 것일까? 내 내면의 무언가가 꽃을 꺾어가는 그 형상을 만들었고 모기는 단순한 핑계일 뿐일까? 만약 모기가 내 잠을 깨운 것이라면, 만약 내가 모기 때문에 깨지 않고 계속 꿈을 이어갔다면 나는 과연 꽃을 꺾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