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홍 釉裡紅

kimyounga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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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ulsanren입니다.
오늘 제 수집품중 한개를 포스팅하는 것은 중국 유리홍 다완입니다.
한국의 옛 다완들에서도 죽절굽은 자주 보이고 다인들에게 인기좋은 굽의 형태죠. .중국 다완인데도 이 다완의 굽은 죽절굽이 뚜렸합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드는 다완입니다.
이 다완은 유약과 형태를 살펴보아서 발전하지 않은 원시적인 형태로 보아서 元代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이즈个头儿:高 7.5cm-口径13cm

釉裡紅(中國紅瓷)在晚唐已有出現雛形,元代發揚成熟,江西景德鎮創燒的一種瓷器釉彩以氧化銅在瓷胎上彩繪,再塗一層透明釉,以高溫還原焰燒成,呈紅色光潤柔和。

明清是红瓷发展的极盛期,宣德时期红瓷创新分为釉里红和青花釉里红两大类。到了清康熙年间制造工艺突出,红瓷成品色调有不同的浓淡层次,品种也多样,有釉里红、青花釉里红加彩、釉里三彩、青花釉里红等。

紅瓷難題在於爐溫必須恆常保持在1450℃上下,犯錯區間極少,且通常要四次进炉:一是素烧,二是釉烧,三是红烧,四是金烧;所以陶瓷界常大诉“十窑九不成”、“千窑难得一品”的苦衷所以古今成品稀少價格高昂不下,近代1990年代後透過電腦化恆溫燒爐和加入钽和若干稀土元素,中國才研發出真正大紅色的紅瓷,並可以量產,從而開始在民間普及。

‘홍유’는 동을 착색제로 한 유하홍색으로 원대 경덕진에서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유리홍의 일종이다. 홍유는 완전히 우연의 산물로 출현했는데 당대 호남 장사요(長沙窯)에서 녹색을 나타내기 위해 산화동을 사용하였으나 소성 분위기의 영향으로 환원염이 출현해 홍색이 착색됐다. 이때부터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홍색자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명선덕연간, 선덕황제가 선홍색의 자기로 일신(日神)에게 제례를 올리고자 생각하여 경덕진에 제작을 명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명 조정에서 만족할만한 제기를 제작하지 못했다. 감독관이 도공들을 닦달하여 일부를 옥에 가두고 성공하지 못하면 목을 치겠다고 협박했다. 늙은 도공의 딸인 '취란'은 이 소식을 듣고 어요창으로 가서 자신의 부친이 옥에 갇힌 것을 보고 분노에 떨었다. 취란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마속으로 몸을 던져 목숨으로 명 정부에 항의했다. 이틀 뒤, 도공들이 취란이 몸을 던진 가마를 열어 젖혔을 때 신기하게도 소성된 기물이 모두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이처럼 홍색의 제기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취란의 피가 도자기를 물들였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홍색의 자기를 제홍이라 불렸다. 가마에 몸을 던진 취란을 기념하기 위하여 도공들은 이후로 가마의 구멍을 봉쇄 할 때 벽돌을 쌓아 소녀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 관습은 도공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후 역대 황제들이 제홍을 제작 시켰지만 아름다운 홍색의 자기는 신화전설의 보물처럼 얻기가 극히 어려웠다.

경덕진도자관에 소장된 만여점의 소장품가운데 제홍은 9개와 절반이 있을 뿐이다. 절반은 명대 선덕연간의 제홍으로 파손되어 반만 남아있다. 이후 제홍의 기법은 실전되었다.

1982년 경덕진 시 정부에서 주산로에 전선을 매설하는 과정에서 명대의 색요유적지가 발견됐다. 색요는 어요창에서 전문적으로 안색유자기를 생산하는 가마다. 이 색요유적지에서 대량의 홍유자기 파편이 출토됐다. 홍유자기는 황제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었으며 낙선된 자기는 깨트려 깊이 묻었다.

하남의 균요에는 ‘열에 아홉이 완성되지 못한다’ 는 말이 있으며, 이것은 홍유 제작이 극히 어렵다는 말이다. 경덕진의 제홍은 균홍보다 더 제작하기 어려웠으며 민간의 구전에 따르면 '천개의 가마에서 하나를 얻는다'고 한다. 명대의 어요에서는 국가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만점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홍유자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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