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읽어야 할 책을 학교 근처 카페에서 읽고 있다. 현충일이지만 시험기간이라 학생들이 많다. 나는 시험 대신 학기말 소논문 두편이다. 관련 서적을 읽고 있다. 그것은 연세대 출판부에서 낸 할렘르네상스. 오타가 많고 소설 작품 줄거리를 잘못 쓴 부분도 있다. 역사 부분만 보아야 하겠다.
커피를 아이스로 시켰는데 비가온다. 얼음이 녹아서 손이 시린데 주인이 문을 짝 연다.
카페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내 발 밑에 엎어져있다. 옆자리에서는 네 명의 전기공학을 전공하는 듯 한 공대생들이 전선과 다이오드로 무엇을 만들며 촬영하고 있다. 나도 공대생이었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무슨 샌드박스 뭐뭐,. 이야기를 한다. 그 옆자리에서는 간호학과 학생들이 앉아서 전공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학생은 늘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학생이란 무엇인가. 학생이란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해야 한다면 이미 학생 시절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학생이란, 자신에게 무엇이 주어진 줄 알지 못하므로 불행하게 방황하다가 행복을 쥐어짜보다가, 자신의 전공에 자신을 맞춰도 보고 자신의 전공에 반항도 해보고, 그러다가 새로운 불만족을 찾아 떠나는 그런 신분 아닌가. 가면은 가면일 뿐이지 진짜 얼굴이 되진 않는다. 문제가 있다면, 진짜 얼굴이 없다는 사실이겠지. 이 과정을 통해서 쭉 추구하는 것은 인정욕구충족이겠고, 허위의식 속에서의 안정이겠다. 인정욕구로 일어나는 행동을 더욱 학술적으로 말하여 설명하면 정신분석이 될 테고, 그것이 내가 요즘 읽는 슬라보예 지젝과 레나타 살레츨, 프로이트 문명속의 불만에서 계속 다루는 주제다. 그렇다고 내가 카페 안 사람들의 정신을 다루어 무언가 할 수는 없고, 관찰만 해야 한다. 거기에 지금처럼 생각을 집어넣으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자꾸 자리를 옮겨 앉는 남학생도 있다. 반바지를 입은 학생인데, 차가운 허벅지를 자꾸 손으로 비빈다. 추울 땐 책을 읽기가 힘들다. 그것은 자주 사실이다. 책은 자주 사람을 더욱 춥게 만드니까. 나는 함부로 추운 곳에서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소설 같은 것은 읽지 않는다. 나이가 들 수록 몸이 식으니까, 더 읽지 않게 된다.
남자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고 있다. 4년 전에 읽어 본 바 있는 소설이다. 자유로운 주인공의 성격 때문에, 그 농담이 공산당 체제 아래서 어떻게 변절자의 음모로 오해받는지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골자는 공산주의의 병폐고발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이즘이, 모든 젊은이들의 얼굴에 어떤 가면을 씌웠고, 그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농담만도 못했던가, 그 참을 수 없는 진지함의 가벼움과 덧없음을 이야기 한다.
덧 없지. 덧 없어야 한다. 대의를 위한다는 모든 정신은 싱그럽게 덧 없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권위의 덧을 가지면, 그것이 박사모가 되고 독재찬양이 된다. 의미없이 휘날리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된다. 너무 많이 보아왔던 역사가 아닌가. 밀란 쿤데라가 정치인이 아닌데 정치 이야기를 해야 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정치가 휘둘렀던 어떤 허위의식이 모두의 목을 조를 때, 문학의 성대는 정치에 목이 메인다. 정치를 먼저 말해야 다른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밀란 쿤데라는 운이 좋았다. 대다수의 문학가들은 그 속에서 죽어버린다. 더 이상 소설로 미학을 찾지 못하게 되고, 시도 마찬가지다.
정권교체가 이뤄진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그래서 아직도 무언가 쓰려면 정치이야기가 자꾸 섞인다. 다른 걸 쓰려다가 흠칫 놀란다. 지금 이게 가능한 일인가..내상이 컸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