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그 남자 이야기
폴리애나가 ‘그 남자’를 다시 본 것은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남자에게 인사했다.
“오늘은 그다지 날씨가 좋지 않네요, 그렇죠? 어쨌든 항상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니 기뻐요!” 폴리애나가 쾌활하게 말했다.
남자는 툴툴거리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폴리애나는 남자가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날 남자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좀 더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렇게 밝은 햇살과 상쾌한 아침 공기 속에서 뒷짐을 진 채 땅만 바라보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폴리애나는 오늘 특별히 심부름을 가도 좋다는 상을 받고 집을 나선 터였다.
“안녕하세요? 어제 같은 날씨가 아니어서 기쁘네요. 그렇죠?”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화가 난 듯 무서운 얼굴이었다.
“이봐, 어린 아가씨.”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오늘은 끝장을 보자고. 난 날씨 말고도 생각할 것이 무척 많아. 햇빛이 밝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폴리애나는 즐겁게 활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가르쳐 드린 거예요.”
“그래. 아니, 뭐라고?” 폴리애나의 말뜻을 알아챈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아저씨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 제가 말씀드린 거라고요. 햇빛이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요. 그냥 잠시 생각해 보면 아저씨도 분명 기쁨을 느끼실 거예요. 아저씨는 전혀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아니, 무슨 이런….” 남자는 이상하게 맥이 빠진 듯한 행동을 취하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걸음도 채 가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찌푸린 얼굴이었다.
“같이 이야기할 네 또래의 아이들을 찾아보지 그러니?”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이 근처에는 아이들이 없다고 낸시가 그랬어요.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어요. 전 어른들도 좋아하거든요. 더 재미있을 때도 많아요. 부인회한테 익숙해져 있어서요.”
“흠! 부인회라니! 나를 부인회 대용으로 삼으려는 거냐?” 남자는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지만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짐짓 심각한 척 애쓰고 있었다.
폴리애나가 신이 난 듯 웃었다.
“아, 아니에요, 아저씨. 아저씨는 부인회와 요만큼도 닮지 않은걸요. 하지만 부인회만큼 좋으신 분인 것 같아요. 어쩌면 더 좋으신 분일지도 모르죠.” 폴리애나가 급히 덧붙였다. “아저씨는 보기보다 훨씬 더 좋으신 분일 거예요!”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글쎄, 뭐….”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언제나처럼 휙 가 버렸다.
다음번에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남자는 재미있어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폴리애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폴리애나는 그가 정말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안녕.” 남자가 약간 뻣뻣하게 인사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오늘 날씨가 좋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말씀 안 해 주셔도 돼요. 아저씨를 보자마자 알아차렸거든요.” 폴리애나가 밝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니?”
“네. 아저씨 눈에, 웃는 얼굴에 다 쓰여 있었어요.”
“흠!” 남자가 지나가며 생각에 잠겼다.
이후 남자는 항상 폴리애나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먼저 말을 걸 때도 자주 있었다. 물론 보통은 “안녕” 하고 인사하는 게 전부였지만. 어느 날 폴리애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낸시는 무척 놀랐다. 놀라운 일이었다.
“세상에. 아가씨, 그 남자가 아가씨와 이야기를 했다고요?”
“맞아요. 항상 그런걸요.” 폴리애나가 웃어 보였다.
“항상이요! 맙소사! 그 남자 이름은 알아요?” 낸시가 물었다.
폴리애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가 이름 말해 주는 걸 깜박했나 봐요. 난 내 이름을 알려 주었는데.”
낸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남자는 업무상 꼭 필요한 경우를 빼고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아요. 몇 년 동안이나 그랬죠. 이름은 존 펜들턴인데 펜들턴 언덕의 큰 저택에 혼자 살아요. 심지어 요리해 주는 사람 한 명 없어요. 하루 세 끼를 호텔에서 해결하죠. 호텔에서 그 사람 시중을 드는 샐리 마이너가 그러는데 겨우 알아들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주문을 한대요. 거의 추측해서 음식을 내가는데 값싼 음식만 주문한대요!”
폴리애나가 안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해해요. 가난하면 싼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잖아요. 아빠와 나도 밖에서 자주 식사를 했지만 대부분 콩과 생선볼이 전부였죠. 콩을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특히 구운 칠면조 음식점을 지날 때면 더 그랬죠. 그건 60센트나 하니까요. 펜들턴 아저씨도 콩을 좋아하실까요?”
“좋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 사람은 가난하지 않아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돈이 정말 많다고요. 이 마을에서 그만큼 부자인 사람도 없을걸요. 원한다면 돈도 먹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돈인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폴리애나가 킥킥 웃었다.
“낸시, 돈을 먹으려면 씹어야 하는데 그게 돈인 줄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만큼 돈이 많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은 돈을 쓰지는 않고 모으기만 하고 있어요.”
“아, 선교 활동을 위해서군요. 정말 훌륭하네요!” 폴리애나가 추측하며 말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에요. 아빠가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낸시는 거친 말들을 내뱉으려다가 폴리애나의 기쁨에 찬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흠! 어쨌든 그가 아가씨와 이야기를 한 건 솔직히 희한한 일이에요. 그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그가 값비싼 물건으로 가득 찬 크고 좋은 저택에서 혼자 산다고 수군거려요.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장 속에 해골을 감춰 두고 있다고도 해요(어마어마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뜻의 숙어-옮긴이).”
“오, 낸시!” 폴리애나가 몸을 떨며 말했다. “어떻게 해골 같은 무시무시한 것을 집에 둘 수 있겠어요? 아저씨는 그런 걸 당장 던져 버려야 해요!”
낸시가 빙긋 웃었다. 폴리애나는 비유적으로 쓰인 해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낸시는 굳이 이 사실을 알려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모두들 그가 묘한 사람이래요. 몇 주 동안 여행을 하기도 하는데 항상 기독교를 믿지 않는 곳으로 간다나 봐요. 이집트라든지 아시아라든지 사하라사막 같은 곳이요.”
“아, 선교사시군요.” 폴리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낸시가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모르겠어요. 어쨌든 돌아오면 그런 나라에서 찾아낸 시시한 것들에 대해 기묘하고 이상한 책을 쓴대요. 하지만 이 동네에선 절대 돈을 쓰지 않기로 한 것 같아요. 적어도 먹고 사는 일에는 말이에요.”
“물론 그렇겠죠. 선교 활동을 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재미있는 분이네요. 뭔가 특이하기도 하고요. 스노우 아주머니처럼요. 또 다른 괴짜인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낸시가 웃었다.
“어쨌든 아저씨와 이야기하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폴리애나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