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의무에 대하여
폴리애나가 이곳으로 온 첫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방 창문이 남쪽과 서쪽으로 나 있어 햇빛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푸르스름하게 밝아 오는 아침 하늘은 볼 수 있었다. 꽤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작은 다락방도 이제는 조금 시원해졌고 공기도 상쾌하고 달콤했다. 밖에서 새들의 즐거운 지저귐이 들리자 폴리애나는 창가로 달려갔다. 정원을 내려다보니 장미 덤불 사이로 이모의 모습이 보였다. 폴리애나는 황급히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폴리애나는 다락방 계단을 급히 내려갔다. 복도를 지나 다음 계단을 내려간 다음 현관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정원까지 달려갔다.
폴리애나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이모에게 매달렸을 때, 폴리는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와 함께 장미 덤불을 살피고 있었다.
“와, 폴리 이모, 폴리 이모, 전 오늘 아침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뻐요!”
“폴리애나!” 폴리가 단호하게 외치며 자신의 목에 매달려 있는 40킬로의 무게에서 몸을 바로 세우려고 애썼다. “넌 보통 아침 인사를 이런 식으로 하니?”
어린 소녀는 이모에게서 떨어져 가볍게 콩콩 뛰었다.
“아뇨. 못 견디게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만요. 창문으로 이모를 보고 있는데, 이모가 부인회가 아니고 내 진짜 이모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모는 너무 아름다워서 이렇게 내려와서 안아 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섰다. 폴리는 눈살을 찌푸리려 했지만 평상시처럼 잘되지 않았다.
“폴리애나, 너란 애는… 토마스, 오늘 아침엔 이 정도면 됐어요. 이 장미 덤불에 대해서는 이해하셨으리라 믿어요.” 폴리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할아버지는 항상 정원에서 일하시나요?” 폴리애나가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할아버지가 돌아보았다. 입술이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고인 듯 침침했다.
“예, 아가씨. 전 톰이에요. 정원사지요.” 그가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주저하며 떨리는 손을 뻗어 잠시 폴리애나의 밝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를 꼭 닮았군요, 아가씨! 아가씨 나이보다 더 어릴 때부터 엄마를 알고 있었지요. 그때도 이 정원에서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폴리애나가 숨을 죽였다.
“정말요? 그럼 엄마가 하늘이 아닌 이 땅의 작은 천사였을 때부터 알고 계셨겠네요? 제발 엄마 얘기 좀 해 주세요!” 폴리애나는 할아버지 옆의 더러운 길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택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다음 순간, 낸시가 뒷문 밖으로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폴리애나 아가씨, 아침 식사 시간이에요.” 낸시는 숨을 헐떡이며 폴리애나를 일으켜 서둘러 저택으로 데려갔다. “식사 시간에는 종이 울릴 거예요. 종소리가 들리면 어디에 있든 항상 뛰어와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전혀 기쁨을 찾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거예요!” 말을 마친 낸시는 다루기 힘든 닭을 닭장에 몰아넣듯 폴리애나를 저택 안으로 들여보냈다.
처음 5분 동안은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이윽고 폴리가 식탁 위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파리 두 마리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엄하게 말했다.
“낸시, 이 파리들이 어디서 온 거지?”
“모르겠습니다, 마님. 부엌에는 한 마리도 없었는데요.” 낸시는 어제 오후 너무 흥분하여 폴리애나 방의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제 파리들일지도 모르겠어요, 폴리 이모. 아침에 위층에서 많이 놀고 있었거든요.” 폴리애나가 쾌활하게 말했다.
마침 낸시가 따뜻한 머핀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다시 급히 나가 버렸다.
“네 파리라고! 그게 무슨 말이니? 파리들이 어디서 왔다는 거야?” 폴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당연히 창문을 통해서 문 밖으로 나왔겠죠. 몇 마리가 제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봤어요.”
“들어오는 걸 봤다고! 방충망도 없는데 창문을 열었단 말이니?”
“네. 방충망이 없긴 했어요, 폴리 이모.”
낸시가 다시 머핀을 들고 들어왔다. 심각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낸시, 그 머핀 내려놓고 당장 폴리애나의 방에 가서 창문을 닫아. 문도 닫고. 아침에 해야 할 일이 끝나면 방마다 돌아다니며 파리들을 샅샅이 찾아내도록 해.” 폴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어 폴리애나에게 말했다.
“폴리애나, 네 방 창문에 달 방충망을 주문하마. 그것이 내 의무니까. 하지만 넌 네가 지켜야 할 의무를 잊은 것 같구나.”
“제… 의무요?” 폴리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래. 네 방이 덥다는 건 알지만 방충망이 도착할 때까지는 창문을 꼭 닫아 두는 것이 네 의무야. 폴리애나, 파리는 불결하고 거슬릴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아주 해롭단다. 식사가 끝나면 파리에 관한 작은 책을 한 권 줄 테니 읽어 보거라.”
“읽을 것이요? 와, 감사해요, 폴리 이모. 전 책 읽는 것이 정말 좋아요!”
폴리는 크게 함숨을 쉬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 그녀의 심각한 얼굴을 본 폴리애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제 의무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해요, 폴리 이모. 다신 창문을 열지 않을게요.” 폴리애나가 주저하며 사과했다.
폴리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폴리는 거실 책장에서 작은 책을 한 권 가져와 폴리애나의 옆에 놓아두었다.
“아까 말한 책이다, 폴리애나. 지금 네 방으로 가서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구나. 30분 후 네 물건들을 살펴보러 갈 테니.”
폴리애나는 몇 배나 확대된 파리의 머리 그림을 보면서 즐겁게 외쳤다.
“와, 감사해요, 폴리 이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폴리애나는 신나게 방을 뛰쳐나갔다. 그 뒤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폴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발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폴리애나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30분 후 폴리가 얼굴을 온통 ‘의무’로 도배한 듯한 얼굴로 다락방 계단을 올라 폴리애나의 방으로 들어가자, 폴리애나는 무척 흥분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 폴리 이모, 이렇게 멋지고 재밌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이 책을 읽게 해 주셔서 정말 기뻐요! 전 파리가 이렇게 많은 것들을 발에 묻혀 옮긴다는 걸 몰랐어요. 그리고….”
“그만 됐다.” 폴리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폴리애나, 이제 네 옷들을 꺼내 보렴. 내가 살펴보마.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 모두 설리번 아이들에게 주어야겠다.”
폴리애나는 마지못해 책을 내려놓고 옷장으로 다가갔다.
“이모가 보시기엔 형편없을지도 몰라요. 부인회원들도 제 옷이 형편없다고 말했거든요.” 폴리애나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난 두세 달 동안 전도품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남자애들 것이나 노인들 것뿐이었어요. 이모도 선교 전도품을 받아본 적이 있으세요?”
충격을 받은 듯 화난 이모의 얼굴을 본 폴리애나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
“물론 없으시겠죠, 폴리 이모!” 폴리애나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부자들은 그런 걸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제가 깜박했어요. 하지만 이모가 부자라는 걸 잊어버리기도 해요. 여기 이 방에 있으면요.”
폴리의 입술이 노여움으로 떨렸지만 폴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폴리애나는 자신의 말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선교 전도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전혀 모르거든요. 어쨌든 예상치 못한 것이 들어 있는 것만은 확실해요. 아빠와 놀이를 할 때 전도품 상자가 제일 어려웠어요….”
순간 폴리애나는 이모에게 아빠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녀는 서둘러 옷장에 얼굴을 파묻고 초라한 옷들을 양팔 가득 꺼내 왔다.
“전혀 예쁘지 않죠? 교회에 빨간 카펫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옷들을 전부 검은색으로 물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이게 전부예요.”
폴리는 손가락 끝으로 옷가지들을 들춰 보았다. 아무리 봐도 폴리애나에게는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다음에는 옷장 서랍에서 더덕더덕 기운 속옷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입은 것이 제일 좋은 거예요.” 폴리애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백했다. “부인회에서 한 벌로 사 줬거든요. 존스 아주머니가 회장이었는데 카펫을 깔지 못해 평생을 삐거덕거리는 통로를 지나다녀야 한다 해도 제게 옷을 사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어요. 화이트 씨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게 싫대요. 신경이 곤두서 있대요. 하지만 화이트 씨는 돈이 많아서 카펫을 사는 데에 기부금을 많이 내실 거래요. 신경에 거슬리니까요. 이럴 땐 돈이 많은 것이 기쁠 거예요. 이모도 그렇죠?”
폴리는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속옷 검사가 끝나자 그녀는 불쑥 폴리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학교는 다녔겠지, 폴리애나?”
“네, 이모. 그리고 아빠… 아니 집에서도 조금 배웠어요.”
폴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좋아. 가을에는 이곳 학교에 입학하도록 하자. 홀 교장선생님이 네가 들어갈 반을 정해 주실 거야. 그동안은 내가 들을 수 있도록 매일 30분씩 큰 소리로 읽기 연습을 하거라.”
“전 읽는 걸 좋아해요. 하지만 이모가 듣기 싫으시면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이모. 그리고 기쁨 놀이도 힘 안 들이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전 혼자 읽는 것이 가장 좋거든요. 어려운 말들이 많으니까요.”
“그렇겠지. 음악은 배웠니?” 폴리가 엄하게 말했다.
“별로요. 전 음악에 소질이 없거든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음악을 듣는 건 좋아해요. 피아노 치는 법은 조금 배웠어요. 교회 오르간을 치는 그레이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죠. 하지만 더 배우지 않아도 돼요, 이모. 정말 그러는 게 더 나아요.”
“그럴 거야. 하지만 음악의 기초 정도는 가르치는 것이 내 의무라고 생각한다. 바느질은 할 수 있겠지 물론?” 폴리가 눈썹을 약간 치켜세우며 말했다.
“네, 이모.” 폴리가 한숨을 쉬었다. “부인회에서 가르쳐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애를 먹었죠. 존스 아주머니는 단춧구멍을 만들 때 바늘 쥐는 방법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고, 화이트 아주머니는 단접기나 다른 기술을 배우기 전에 박음질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해리먼 아주머니는 깁기는 전혀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셨고요.”
“이젠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단다, 폴리애나. 내가 직접 바느질을 가르칠 테니까. 요리는 안 배웠니?”
폴리애나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여름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많이 배우진 못했어요. 바느질 때보다 의견이 더 분분했거든요. 빵 굽는 것부터 배웠는데 방법이 다 달랐어요. 바느질을 하는 동안 토론을 한 결과 일주일에 한 번 오전에 자신의 부엌에서 교대로 저를 가르치기로 했죠. 초콜릿 케이크 하나 배우고 끝이 나 버렸어요.” 폴리애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초콜릿 케이크라니!” 폴리가 경멸스럽다는 듯 말했다. “당장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멈추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매일 아침 9시에 내게 30분 동안 책을 읽어 주거라. 그 전에 네 방을 정돈해 두고. 수요일과 토요일 오전에는 9시 30분부터 부엌에서 낸시에게 요리를 배우도록 해. 다른 날 아침에는 나와 바느질을 하자. 오후에는 음악을 배우도록 하고. 물론 내가 널 가르칠 선생님을 구해 오마.”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폴리애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하지만 폴리 이모, 제 시간은 전혀 없잖아요. 살기 위한 시간 말이에요.”
“살기 위한 시간? 그게 무슨 말이니? 지금까지는 죽어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 물론 그런 것들을 배우면서도 항상 숨은 쉬고 있겠죠. 하지만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잘 때도 숨은 쉬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살아 있다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예요. 밖에서 뛰어논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물론 혼자서요) 언덕을 오르거나 톰 할아버지와 정원에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낸시와도요. 제가 어제 지나온 저 아름다운 길에 있는 집들과 사람들 구경하기. 이런 것이 살아 있는 거예요, 폴리 이모. 그냥 숨만 쉬는 건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요!”
폴리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쳐들었다.
“폴리애나, 넌 정말 별난 아이구나! 물론 놀 시간도 적당히 줄 거야. 하지만 내가 널 제대로 보호하고 교육할 의무를 다하는 한, 너도 네 의무를 다해야 해. 보람도 없이 내 보호와 교육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것 말이야.”
폴리애나는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이모는 마치 제가 은혜도 모르는 아이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전 이모를 정말 좋아해요. 부인회도 아니고 제 이모잖아요!”
“잘 알았다. 그렇다면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도록 하마.” 폴리는 문으로 향하며 인심 쓰듯 말했다.
그녀가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폴리애나의 작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 어떤 옷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인지 말씀 안 하셨는데요.”
폴리는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는 폴리애나의 귀에도 들렸다.
“아, 깜박했구나, 폴리애나. 티머시가 오늘 오후 1시 30분에 우리를 시장에 데려다줄 거야. 네 옷은 내 조카가 입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런 옷을 입고 네가 돌아다니면 난 분명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거야.”
이제는 폴리애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의무’라는 말이 싫어질 것 같았다.
“폴리 이모, 그 ‘의무’라는 것에 대해 이모가 기뻐할 방법은 없나요?” 폴리애나가 아쉬운 듯 말했다.
“뭐라고?” 폴리가 놀라서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화가 난 듯 계단을 내려갔다. “버릇없이 굴지 마라, 폴리애나!”
덥고 작은 다락방에서 폴리애나는 등받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의무’라는 말이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뭐가 버릇없었던 건지 정말 모르겠네. 그저 이모의 ‘의무’라는 것에 어떤 기쁨이 있는지 물어본 것뿐인데.”
몇 분 동안 폴리애나는 조용히 앉아 후회하는 듯한 눈빛으로 침대 위의 초라한 옷가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일어나 옷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무런 기쁨도 찾을 수가 없어.” 폴리애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의무를 다하면 기뻐할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에 폴리애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