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겨울,
스위스 루체른에 도착한 시간은 이른 오전이었다.
이제 막 사람들이 평화로운 꿈에서 깨어나 출근 준비를 할 그런 시간.
중간 기착지인 루체른에 우리가 머물러야 할 시간은 12시간 남짓.
우리는 알프스를 오르기 위해 인터라켄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염없이 거리를 거닐며
"우리, 여기서 뭘 해야 하지?"
"글쎄. 여기 뭐 있나? 난 특별히 하고싶은게 없는데."
"일단 그냥 걷자. 문 연 가게도 없는데."
이런 대화나 주고 받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 앞에 장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여기 이런 호수가 있었나? 우린 정말 이 도시에 아무 관심이 없었구나, 하고는
호수를 향해 빠져들듯 다가갔다.
어떤 경로로 우리가 루체른 호수의 증기선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어차피 할 것도 없고, 시간도 많은데 호수 구경이나 실컷 해볼까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한 달의 유럽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선물해주었다.
증기선이 호수위를 미끄러져 나가자,
시시각각 눈에 담기는 풍경이 바뀐다.
아직 이른 오전.
호수 너머로 알프스 산이 보이고,
루체른 시에서 멀어질수록
아기자기한 호숫가 마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백조 한 쌍이 수면을 스치듯, 우아하게 바람을 가른다.
우리는 넋을 잃고 호수의 풍경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갔을까?
우리는 증기선의 몇 번째 기착지인 어느 이름 모를 마을에 도착했고,
무턱대고 배에 올랐듯이
아무 생각 없이 배에서 내렸다.
동화같은 마을은 15분도 되지 않아 한바퀴를 돌 수 있을 만큼 아담했다.
우리는 작은 마트에서 빵과 물을 사고
다시 호숫가로 와 선착장에 걸터앉았다.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자니,
우아하게 날던 그 백조가 다가온다.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않는 백조에게 빵을 조금 떼어 던져주자, 곧잘 받아먹는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내 손에 든 빵까지 노리고는 덤벼든다.
백조는 무서운 생물이었다.
코알라 같은 녀석!
하마터면 손째로 백조에게 뜯어먹힐 뻔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바람이 호수를 쓰다듬으면, 귓가에 울리는 바사삭,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가끔 들려오는 백조의 물질 소리.
그리고 비상.
이곳에는 자연의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아직 살아있는게 맞나?
혹시, 나는 이미 죽어서 천국에 온게 아닐까?
그렇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앉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아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잊은체
나는 호수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 때, 멀리서 증기선이 뿌우, 소리를 지른다.
돌아가야지. 넌 가야돼, 하고.
여전히 그 곳은 내게 꿈으로 남아있다.
마음이 지친 때면,
눈을 감고 루체른 호수의 어느 이름모를 마을을 떠올린다.
내 영혼의 한 조각을 그곳에 두고 왔는지,
눈을 감으면 나는 그 곳에 있다.
거기엔 내 손을 호시탐탐 노리는 백수의 왕 백조도 그대로다.
언젠가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아무런 계획 없이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 하나면 족하다.
그 다음은 어떻게든 될 것이다.
일단 그 이름모를
호숫가 마을에 도착하기만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