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네스 바르다 – 수집자,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The Gleaners and I)
시작이야 어쨌든 간에, 그리고 그 계기가 어쨌든 간에 프랑스어를 공부한지가 거의 8개월이 넘어 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프랑스 영화나 문화 혹은 그들의 일상에 눈이 갔다.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를 이렇게 공부해 본 적이 나에게는 없다. 내가 이십대도 아니고, 올 해 서른다섯의 나이에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될 지는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사실 프랑스는 나에게 친숙한 나라이다. 이 나라는 영화의 발상지 중에 하나이고, 영화의 혁명을 이끌었던 누벨바그가 일어난 곳이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프랑스라는 나라에서 그 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프랑스라는 나라의 영화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어떤 다른 이면에 대해서 본 것 같고, 지금도 그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짧은 실력이나마, 프랑스어가 간헐적으로 들리면, 그 의미에 대해서 어줍지 않게 파악은 하는 능력은 갖춘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아마 프랑스어 방송을 꾸준히도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연속적으로 본 것과 유튜브를 통해서 프랑스어 강좌를 끊임없이 들었던 노력에 그 원인을 두어야 할 듯하다.
사실 텔레비전은 가장 좋은 스승이다. 언어를 배우는 것에 있어서. 이 과정에서 TV5MONDE 라는 프랑스 국립 방송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대해서도 한 번 글을 적어보고 싶지만, 이 지면에서 그 내용을 적게 된다면, 주제에서 많이 벗어날 것 같기에 길게는 적지 않겠다. 프랑스라는 국가에서 송출하는 방송이다 보니 선택할 수 있는 여지없이 그들의 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그들이 송출했으니 수용자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영화의 능동적인 선택과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이 수동적인 선택의 과정에서 운이 좋게도 프랑스의 아주 잘 만든 다큐멘터리나 혹은 드라마, 또는 르포 형식의 프로그램을 접하게 된다. 이 경험은 상당히 놀라웠다. 프랑스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서 하나의 스팩트럼을 가지고 보았는데, 그것은 “극영화”였던 것이다. 나는 이 거대한 문화의 제국이 광범위하고 복잡한 우주가 얽히고설킨 잘 정리된 미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권은 없지만, TV5MONDE에서 내가 익숙히 들어왔던 이름이 나오면 나는 상당히 반가움을 느낀다. 오늘 이야기할 야네스 바르다의 영화인 “수집자”들이라는 영화가 그것이다. 언어를 배우고 나서 그들의 언어가 나의 귀에 들리면서 영화가 감상될 때와 그들의 언어가 완전히 의미적 묵음이 되어서 나에게 접해 질 때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 번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내가 프랑스를 좋아한 이유는 그 나라 특유의 이미지에 대한 환상에 있었지 않나 싶다. 지적이고, 예술적인 나라. 하지만 최근에 프랑스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노란조끼의 운동을 보면서 나는 이 나라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가식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프랑스가 19, 20세기 영국과 제국주의 경쟁을 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한 크기가 영국에 비해서 결코 적지 않은 크기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프랑스는 아름답고, 훌륭하고 지적이며, 위대한 나라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이면에는 소외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위대하고, 화려한 부분이 이 소외되고, 상실된 사람들의 위치와 존재를 더욱 비참하고, 처량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내가 처음 프랑스에 가진 하나의 환상들이 조금은 부숴 진 상태이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 지구상에 유토피아는 없다는 나의 신조를 다시 한 번 공고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나쁘지만도 않다.
야네스 바르다는 “줍기”라는 행동을 영화의 척도로 삼는다. “줍다”라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 야네스 바라다의 목적어는 무한이다. 그렇기에 그것에는 어떤 대상이라도 모두 들어 갈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줍는 행동의 목적어가 무한이니 만큼, 그 대상을 줍는 주체 역시도 무한으로 나아간다. 목적어와 주체가 무한으로 뻗어나가니 만큼, 영화는 프랑스 전체를 관통할 만큼 은근히 큼직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하지만 “줍기”라는 행동에는 의외로 상당히 까다로운 전제가 동사의 안쪽에 버티고 있다. 사실 풍족한 사람들이나 처지가 여유로운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주울 필요가 없다. 그들은 산다. 혹은 그들은 만든다.(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팔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야네스 바르다의 나레이션에서 나오듯이 줍는다는 행동은 무언가를 땅에서부터 자신을 향해 끌어올려야 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주체가 땅을 향해 자신의 몸을 굽혀야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 같은 전통에 대해서 그녀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을 든다. 이 서정적인 프랑스의 서민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은 줍기라는 문화가 프랑스 안에서 오랜 전통 속에서 현재까지 상존하는 하나의 척도라고 말한다. 이것은 프랑스 세계의 풍족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유럽 대륙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그 광활하고 넓은 영토에서 생산되고 산출되는 어마어마한 양식은 이미 추수가 끝이 나고서도 그 남은 양식을 무상으로 취하려는 아무개들에게 베푼다.
하지만 또한 줍는 행위가 걸식이나 혹은 구걸과 연결이 된다는 비참함 역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을 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행위. 마치 신이 불쌍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광활한 영토 위에 음식을 남겨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다. 선택 받은 자들, 앞서서 말했듯이 위대하고 화려한 프랑스의 상위 계층에 속한 이들이 깨끗하게 추수되고, 만들어진 음식과 물건 사태와 사물들을 취할 때, 소외된 이들은 남겨진 것을 겸손 되게 땅으로부터 자신을 향해 줍는다.(그런데 어떤 이들은 줍는 행위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맞다. 그들이 만약 줍는 행위에서 감사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신이 베푼 것이 아니다. 신은 목적 없이 목적에 부합하는 목적 없는 자연을 창조했듯이 프랑스라는 땅 위의 풍족함을 아무 목적 없이 창조했다. 그들의 줍는 행위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풍족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몇 명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들의 줍는 행위에 대한 범사회적 접근과 그들 특유의 삶의 방식은 삶이 무엇일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기괴하기도 하고, 또 안쓰럽기도 한 그러한 삶의 양태들.)
만일 이 땅이 척박한 어느 나라였다면, 음식 자체가 귀한 나라였다면 어떠했을까? 물론 이 프랑스에서도 사는 것이 힘들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몇몇 등장인물들의 존재는 폐부를 확실히 찌르는 부분이 있다. 그들은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삶이라는 부조리가 그들에게 닥친 점도 있다. 그들은 생을 연명하기 위해서 땅으로부터의 무언가를 건져 올려야만 한다. 그들의 부조리는 그들에게 겸손 되게 땅에서 무언가를 찾으라는 어떤 가르침을 주었다.
야네스 바르다의 위대한 이름은 60년대에 시작되었던 누벨바그라는 절대 불변의 영화 사조에서 알려졌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고 나서, 그녀의 예술 활동은 꾸준히, 그리고 멈추지 않는 기차와 같이 한 결같이 이어졌다. 이 영화는 2000년 이후에 만들어진 그녀의 영화이다. 영화에서 야네스 바르다가 간헐적으로 모습을 비출 때마다 정말이지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한 존경스러우며, 경외가 느껴진다. 그녀의 주름진 손에 잡힌 디지털 카메라는 영화 장비 타령하며, 영화 찍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던 나의 모습에 대해서 절로 반성을 하게 만든다. 자그마한 시를 쓰려고 그녀는 영화를 찍은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야네스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이미 그녀는 거장이자 엄청난 예술가이다. 그러다보니 이 자그마한 시가 완성이 되자 프랑스 전체를 아우르고 말았다.
글쎄 오래간만에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과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껴지게 한 것 같다. 언제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지는 모르겠다. 국내 개봉을 하지 않은 영화인 것 같고, 국내 개봉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야네스 바르다의 이름은 반영구적으로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시네마테크에서는 기회가 되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연찮게 텔레비전에서 접하게 되었고, 그랬기에 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정적이었던 것 같다. 나의 좋지 않은 기억력이 언제까지 이 영화를 자세하게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꽤 남아있을 것 같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