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던 장소는 기억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성을 맺는다. 이 소설에서 특정 장소들에 대한 기억을 상기하도록 해주는 단서들은 이성호가 서하숙을 만난 이후에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불시에 떠오르게 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시청 역 지하철역에 쓰러져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눈을 뜬 후 처음으로 본 것은 벤치에 누워있는 자기 자신이다. 첫 번째 장 ‘크리스마스 이브,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그 때 상황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이성호가 눈을 뜬 곳은 밤의 지하철역이었다. 자고 있었던 걸까. 글쎄. 의식을 되찾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지하철역 벤치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마침 전동차가 눈앞에 와 멈추는 것을 그는 어슴푸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어 전동차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느낌을 던져주었고 그는 자신이 납득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이어 낯선 곳에 버려져 있다는 쓸쓸한 자각이 뒤통수로 차갑게 몰려들었다.
전동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주는 추상적인 것은 시청 앞 지하철 역이라는 장소가 그의 의식 속에서 낯선 장소로 나타남을 의미한다. 그 후 그는 시청 앞 주변을 혼자 배회하면서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기억은 떠올라주질 않는다. 낮에는 지하철 벤치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을 알아봐주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밤이 되면 편의점이라는 인공적인 공간 속에 들어가 햄버거나 라면으로 배를 채운 후 경찰서 앞을 서성인다. 그러다가 그가 들어가는 곳은 다시 인공적인 장소인 PC방이나 비디오방이다. 그 곳에서 몇 시간 눈을 붙이고 나서 나와 전철 운행을 시작하는 시각에 맞춰 다시 지하철역 벤치로 돌아가는 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를 도와주는 인물은 그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또 다른 인물인 서하숙이다. 그녀는 하얀 지펠 냉장고를 갖는 게 꿈인, 컴퓨터, 텔레비전, 휴대폰을 가족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편의점에서 이성호를 눈여겨 본 서하숙은 그를 자기 집에 데려가 지내게 한다. 서하숙의 집에 얹혀 살면서 그녀의 삶을 관찰하게 된 그는 그녀가 어두운 어항 속의 한 마리 다랑어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목도한다.
그녀의 방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는 먼저 방 안을 석탄처럼 채우고 있는 고독의 냄새를 맡았다. 눈이나 비가 내리는 밤이면 자주 귀가 들리지 않고 눈앞이 보이지 않는 단단한 고독. 이를테면 축축한 공기 속에 배어있는 키 작은 여자의 오래된 슬픔.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은 데스크 톱 컴퓨터와 14인치 텔레비전과 15도쯤 왼쪽으로 각도가 기운 비키니 옷장, 미니 컴포넌트, 3.5 킬로그램 용량의 낡은 세탁기, 그리고 냉장고와 빨간 담요가 전부였다. 월세로 얻은 다섯 평 남짓한 방이 오히려 넓어 보였다. 벽면엔 라면 조리범들이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라면요리사로 레시피를 개발해서 강의를 해주고 그 일로 생계를 잇는 독신녀다. 그녀와 함께 사는 가족은 컴퓨터와 텔레비전, 미니 컴포넌트와 세탁기, 냉장고 같은 전자 제품들이며 타인과 거리를 둔 고독한 삶의 패턴은 기계적 매카니즘에 의존하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김광석이나 리키 리 존스 음악을 오토리버스시켜 놓고 들으며 인터넷에 접속해 자신의 라면 요리 정보를 올리는 홈 페이지에 올라온 글들을 읽고 답장을 해주는 일을 한다. 아침에 라면을 끓여먹고 나서 대개 정오에 가방을 들고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식의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 서하숙의 생활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의 생활은 시계처럼 정확한 규칙들을 따라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와 그녀가 처음 함께 외출하는 것은 동대문에 있는 두산타워와 밀리오레 빌딩으로 옷을 사러 나갈 때다. 프레야 극장에서 <인랑>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같이 보다가 언젠가 비슷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그가 인터넷을 통해 기억상실증에 대한 정보를 찾던 도중 자신의 상태가 해리성 기억상실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억의 전환에 장애가 발생하는 이 병은 의학적, 검사만으로는 그 원인을 밝히기 힘든 것이다.
이는 과거 심인성 기억상실이라고 불리던 장애로서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중요한 정보를 갑자기 회생시키지 못하는 장애다. 단순한 건망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이며 뇌기능장애 때문이 아니다. 어떤 특정 사건과 관련되어 심적 자극을 준 부분을 선택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지속적인 과거 생활을 포함한 전 생애나 그 중 일정 기간에 대한 기억상실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는 능력은 남아 있다.
이는 한편 전환 장애로도 불리며 과거의 기억, 자아 각성, 즉각적 감정, 몸의 움직임의 부분적 또는 완전한 통합 상실을 말한다. 모든 종류의 해리 장애는 수주나 수개월이 지나야 완화되며 해결할 수 없는 문제나 대인 관계의 곤란 등에서 야기될 때는 특히 만성적 장애로 발전할 수 있다. 의학적 검사만으로는 기존의 신체적, 정신적 장애 요인을 밝히기 힘들다.
윤대녕은 두 인물들이 서로의 고독을 공유하고 기억을 사는 일을 통해서 고독이 주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안을 통해서 배움의 행위들이 시간을 되찾아 가게 해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느 날 서하숙은 새벽 5시에 돌아와 흐느껴 울다가 그에게 천수만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한다. 천수만에 가려는 이유는 단지 철새들을 보기 위함이다. 그곳에서 이성호는 서하숙에게 자신이 기억을 잃어 버렸음을 고백한다. 누군가 자신의 상태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시계 바늘이 멈춰버린 셈이군요.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처럼 말예요.”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 앞으로 어떻게 할 거죠?”,“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상태가 완화되길 바랄 뿐이죠.”,“만약에 기억을 되찾지 못하면 그땐 어쩔 건데요? 새조개처럼 영원히 조개껍질 속에 들어가 바다에 숨어 있을 건가요?”, “기억을 되찾지 못하면 당신은 계속 1분 전의 상태로 살아가야 해요. 생각해 봐요, 시계 바늘이 움직여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옴싹달싹할 수 없잖아요.”
서하숙은 이성호에게 기억을 이식받을 것을 권한다. 영화 속 사이보그처럼 남의 기억을 빌려서 살아가라는 말에 그는 처음에는 놀라지만 결국 제안을 수락한다. 서하숙이 이성호와 떠난 천수만 여행은 기억 이식의 아이디어가 나타나는 곳으로 서울에서의 죽음과도 같은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기억에 대한 자극을 주는 공간이다. 이 장소에서 두 사람이 멈춰 버린 기억의 상태를 대체 기억으로라도 바꾸기로 결정한 것이다. 천수만은 윤대녕 소설의 토포스로서 도시로 되돌아오기 위한 치유의 장소다. 어떤 사건이 실제 일어난 공간을 장소라고 할 때 천수만에서 철새소리를 들으며 보낸 이들의 여행은 두 사람의 관계가 동일한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암시하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미래의 시간을 불러 들이게 된다. 그들은 이제 동반자가 되었다. 인공 기억은 이성호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도록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