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중반 유럽의 귀족들은 스타킹을 반드시 착용해야 할 장신구로 여겼는데, 특히 값비싸고 부드러운 비단 스타킹을 선호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는 모직물 스타킹만 신다가 1560년대에 처음으로 비단 스타킹 한 켤레를 선물 받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감촉이 좋고 곱고 섬세한 비단 스타킹이 무척 마음에 드므로 앞으로는 모직물 스타킹을 신지 않겠노라.”
여왕은 할 켤레에 2파운드나 하는 비단 스타킹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수습 시녀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나 여왕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스타킹을 일주일만 신고는 시녀들에게하사했다. 여왕의 속살에 닿았던 물건을 하사받는 것은 공연중에 록스타가 벗어던진 땀 젖은 티셔츠를 잡는 것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영광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1571년 영국의 모직물 산업을 진흥한다는 이유로 일요일마다 모직 모자를 쓰도록 의무화하는 법을 통과시켰다는 점이다. 비단 때문에 모직물을 내팽개친 사람치고는 다소 위선적인 행동이었다. 비단 스타킹은 일반인의 벌이로는 절대로 살수 없는 물건이었고 울 스타킹이 훨씬 대중적이었다. 숙녀용 양말은 무릎 정도의 길이였던 반면에 남성용 양말을 일컫는 네더스타킹은 사타구니까지 올라오는 길이였다.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그레그 제너 지음, 서정아 옮김, 와이즈베리, 페이지 259-260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는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Elizabeth Tudor)이다.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조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늘 “짐(朕)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은 종교분쟁을 지혜롭게 해소했다는 사실이다. 메리 1세의 로마 가톨릭 복고 정책 그리고 성공회와 개신교에 대한 탄압으로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등의 성공회 주교들을 포함한 약 300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화형으로 순교당한 공포 정치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성공회 신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를 환호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는 성공회였지만,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독실한 성공회 신자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고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종교분쟁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 극단성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1559년 헨리 8세의 반(反)교황법령을 되살린 《왕위지상권》(흔히 수장령이라고 부르는데, 왕위지상권이라고 하는 게 맞다.)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영국 성공회를 다시금 영국의 국교로 확립하여 자신을 영국 성공회의 상징적인 수장으로 선언하였다. 물론 왕위지상권은 근대에 이르러, 잉글랜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으며,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에 속한 성공회 교회들은 영국 왕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관구교회)들이기 때문에, 성공회를 영국국왕이 수장인 교회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노선을 걸음으로써, 종교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바로잡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중용정책은 성공회가 개혁하는 보편적 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로 설명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도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들을 지원하여 에스파냐를 견제하였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는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그 결과 가톨릭을 국교로 한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금이 가게 되었고, 그 이래로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가 장로교를 믿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린 아들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68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메리는 그 후 20년 동안 자신이 헨리 8세의 누나의 적손녀임을 내세워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여 영국의 왕위를 차지할 온갖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가 1587년 마침내 엘리자베스 1세 암살 계획이 모의된 배빙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메리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를 견제하는 데 필요한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되자 에스파냐는 잉글랜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1588년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가 자랑하는 ‘무적함대’를 출동시켜 잉글랜드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무적 함대는 영국 해협에서 교묘한 작전을 사용한 영국 함대에 패하고, 그 후 폭풍우를 만나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 에스파냐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고, 유럽에서의 주도권도 상실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는 비단 스타킹이 없지만 현대는 듀퐁사가 나일론 개발한 이유로 여성들은 스타킹이 필수품이 되었다. 그런데 더운 여름철이면 스타킹 신는 것만으로도 더워질수 있다. 하지만 종아리나 허벅지등 다리에 튼살이 있는 경우에는 스타킹으로 가릴 수밖에 없어 진퇴양난이 된다.
강남역 4번출구 www.imagediet.co.kr 자향미한의원에서는 종아리나 허벅지등에 있는 튼살을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가 가능하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