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을 건드리면 파멸한다 한비자와 겨드랑이 흉터치료
민무구·무질 형제의 탄핵은 만 2년 8개월(햇수로 4년)이나 계속됐다.
민씨 형제는 처음엔 황해 옹진(민무구)과 경기 장단(민무질)로 자원부처됐다가, 여흥(민무구)과 대구(민무질)로 다시 쫓겨갔다. 민씨 형제는 급기야 제주도까지 밀려났다가, 그곳에서 자진의 명을 받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옹진·장단→여흥·대구→제주→자진(自盡)’으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거론된 죄목 외에, 특기할만한 여죄(餘罪)들이 탄핵과정에서 우후죽순처럼 제기됐다. 태종이 처남들의 ‘10대 죄상’을 거론하면서 언급한 여죄를 보자.
“과인(태종)이 등에 매우 큰 종기(腫瘡)가 났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민무구·민무질 형제는 가만히 내 병세를 엿보고 치료할 뜻이 없이 사사로이 모여 9살 된 자식(양녕)을 끼고 나라 권세를 쥐려고 획책했다. 또 민씨 형제는 양인(良人) 수백명을 핍박하여 자신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종이 된 사람들이 신문고(鼓)를 쳐 억울함을 호소했다. 또 과인(태종)이 세자 시절 입었던 관대를 지금의 세자(양녕)에게 전하려 할 때 민무구는 제 마음대로 이 관대를 착용하고 교만 방자하게 굴었다.”
《태종실록》 1408년 10월 16일 조를 보면 대사헌 박은 등은 민무구 형제를 두고 “고기를 회쳐먹어도 시원치 않을 대역죄인들”이여 “난신의 목을 베는 것이 <춘추>의 의리”라고 앙앙불락했다.
*신료들의 ‘무력시위’
쉬이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민씨 형제의 목숨이 끊어져야 끝날 싸움이었다. 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살아있다면 언제든 세력을 회복해서 피의 보복을 하지 않겠는가.
꼬투리는 계속 잡혔다. 귀양지에서 민무구 형제들에게 아부를 떨며 친분을 맺은 사람들이 포착됐다. 덧붙여 형제를 둘러싼 동정론이 비등해진 것도 민씨 형제의 명을 재촉했다.
예컨대 《태종실록》 1409년 6월 1일 조를 보면 이지성은 세자(양녕)의 명나라 조현 행차(1407년)에 따라나서 남몰래 “민무구 형제는 죄없이 쫓겨났다”고 귓속말한 것이 탄로났다. 또 우정승이자 개국공신인 이무와, 원평군 윤목·한성소윤 정안지 등은 “민무구 형제가 불쌍하다”는 둥, “민무구 형제가 귀양 중이지만 잘 대접하라”는 둥의 큰일 날 소리를 발설함으로써 명을 재촉했다.
1410년(태종 10년) 3월18일, 성석린·김한로·설미수 등 원로대신들은 제사를 지내러 궁을 나와있던 태종에게 달려갔다.
“대간들의 상소가 벌써 (햇수로) 4년이나 되었습니다. 수적(首賊·민무구 형제)을 베지 않고서는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뭐 그리 바쁘냐. 내일 제사를 지낸 뒤 결정하면 안되겠느냐.”(임금)
“아니되옵니다.”
태종의 고민은 2경(밤 9~11시 사이)이 되도록 계속됐다. 대신들은 혹은 서서, 혹은 앉아 임금의 결단을 기다렸다.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견디다못한 태종은 의정부·백관·대간의 상소에 답하는 영을 내렸다.
“민무구·민무질에게 자진하도록 해라.”
*태종의 이중플레이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아니었다. 민씨 가문에는 살아있는 아들들이 또 있었으니까….3·4남인 민무휼·민무회 형제였다. 1407년 11월, 형들인 민무구·무질 형제가 한창 탄핵받고 있을 때였다. 태종은 근신 중이던 민무휼·무회 형제를 특별히 불러 위로했다.
“요사이 처남들은 왜 출사하지 않는고?”
“(무구·무질 형제와) 같은 민씨이니 감히 문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임금이 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 무슨 말인고? 너희는 불충한 형들을 사랑하고 나를 버리는가? 옛날 주공(周公)이 불충한 형을 베고 주나라 왕실에 충성을 다한 것을 어찌 모르는고?”
주공(周公)은 누구이고, 주공이 벴다는 형은 누구인가. 주나라를 창업한(기원전 1046년) 무왕이 죽자(기원전 1043년) 강포에 싸인 어린 왕(성왕)이 등극했다. 이때 섭정에 나선 이가 바로 무왕의 둘째동생 주공이었다. 그러자 첫째동생인 관숙과 셋째동생인 채숙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 반란군을 진압한 뒤 형인 관숙을 주살했다. 태종은 바로 이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너희(민무휼·무회)는 형들(무구·무질)의 죄를 딛고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대단한 격려가 아닐 수 없었다.
태종은 아버지(민제)의 장례를 끝낸 민무휼·무회 형제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어주었다.(1411년 6월)
“오늘 여러 민씨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민씨의 마음에 대해 미안하게 여긴다.”
그러면서 태종은 민무휼·무회 형제에게 “중전(원경왕후)을 위해 잔을 올려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처남들을 죽인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믿었던 세자의 고자질
하지만…. 민씨 가문은 또 한 번의 피바람에 몸서리를 떨었다.이 피바람은 엉뚱하게도 민씨 가문에서 어린 시절을 자란 세자(양녕대군)의 ‘고자질’에서 비롯됐다.
1415년(태종 13년) 6월6일 아침이었다. 태종 임금이 세자 및 효령·충녕대군 등과 함께 편전에 나와 있었을 때, 세자가 뜬금없이 2년 전의 일을 들춰내며 외숙인 민무휼·민무회 형제를 탄핵했다.
“1413년, 중궁(원경왕후)이 편찮아서 병문안을 가서 두 아저씨들(민무휼과 민무회)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때 민무회가 ‘민씨 가문이 망하고 두 형이 죽은 연유’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 때 세자가 “외숙의 가문이 교만방자하여 불법을 자행했으니 화를 입음이 당연하다”고 책망했다는 것.
그런데 이때 민무회의 대꾸가 결정적인 한마디가 됐단다.
“세자는 민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어릴 적 키워준 공을 모르고 외가를 욕보이는 말을 하느냐는 원망이 분명했다. 세자도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민무휼이 세자를 따라와 “동생이 실언한 것이니 괘념치 말라”고 해서 겨우 무마됐다. 그런데 세자는 2년이 지난 뒤에 이 때의 일을 부왕에게 ‘고자질’한 것이다. 세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때는 그냥 넘어갔지만 지금까지도 개전의 정이 없고, 여전히 원망하는 말이 나오므로 아뢰는 것입니다.”
중전(원경왕후)을 비롯한 민씨 일가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한(恨)이었으리라.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은 물론 외가를 욕한 세자에까지 그 원망을 드러냈을 것이다.
세자도 그런 외가의 분위기가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어쨌든 세자의 ‘고자질’로 피바람의 서막이 올랐다.
술취한 세자 ‘외삼촌들을 죽이소서’
민무휼·무회 형제는 형들과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수렁에 빠졌다. 처음에는 민무휼을 원주에, 민무회를 청주에 귀양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세자가 앞장섰다. 그것이 민무구·무질 형제 때와 달랐다.1416년(태종 16년), 임금이 제례를 마치고, 광연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을 때였다. 세자(앙녕대군)가 한껏 술에 취해 부왕에게 나서 아뢰었다.
“종사는 오로지 전하의 종사만이 아닙니다. 죄인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무휼·무회 형제를 법대로 처치함이 옳습니다.”
태종은 세자의 이 말에 귀를 쫑긋하면서 최한에게 일렀다.
“경은 세자의 이 말을 자세하게 들어두라.”
결국 민무휼·민무회 형제는 “임금와 세자를 원망하면서 역심을 품었다”는 죄목으로 귀양지에서 자진(自盡)해야 했다.(1416년) 태종이 내린 명은 이랬다.
“그들을 굳게 지켜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만약 자진하고자 하거든 막지는 말아라.”
웃긴다. 즉시 자진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이로써 임금의 처남 가문이자 세자의 외숙으로 권력을 휘들렀던 4형제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와 함께 민씨 가문도 멸문의 화를 입었다.
*세종 장인의 말로
어디 그들뿐인가. 양녕대군 대신 세자가 되어 보위를 물려받은 세종의 외척은 어땠는가. 세종의 장인인 심온 역시 자살했다.(1418년) 어떤 연고였을까.
“1418년(세종 즉위년), 심온이 명나라 사은사로 떠났다.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되어 수상의 지위에 오르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했다.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서울)이 텅텅 비었다.”
이 때는 상왕(태종)이 아직 군권을 틀어쥐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 외척으로서의 위세가 ‘장안이 텅텅 빌 정도였다’니 태종이 어찌 생각했겠는가. 이미 외척발호를 염려해서 처남 가문을 멸족시킨 이력이 있는데 심온 정도야…. 게다가 심온이 했다는 말 한마디가 상왕(태종)의 심기를 결정적으로 건드렸다.
즉, “군령이 두 곳에서 나오는데 군사는 한 곳에 모여야 하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군권을 휘어잡고 있던 태종을 겨냥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심온을 위기에 빠뜨리려는 모함이었다. 결국 심온 역시 자살을 강요받고 말았다.
*역린을 건드리면 파멸한다.
한비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용이란 동물은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줄기 아래에 한 자 길이의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사람이 이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
‘목줄기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바로 ‘역린(逆鱗)’이다. ‘역린을 건드린다는 것’은 아무리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신하라도 도가 지나쳐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면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한비자는 단적인 예를 든다. 바로 위나라 군주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위자하라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미자하의 모친이 병이 나자 위자하는 멋대로 군주의 마차를 타고 갔다. 위나라 법에 군주의 마차를 훔쳐 타는 자는 월형(刖刑·발뒤꿈치를 자르는 병)에 처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나라 군주는 ‘미자하의 효성’을 칭찬했다. 또 어느 날 위자하가 “복숭아를 맛있다”며 먹던 복숭아를 위나라 군주에게 건넸다.
위나라 군주는 “나를 위해 이렇게 단 복숭아를 주다니!”하고 칭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군주의 총애를 잃었다. 어느 날 미자하가 죄를 짓자 군주는 이렇게 말했다.
“저 자는 예전에 군주를 사칭해서 내 마차를 탔고, 도 먹다만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자다”라며 미자하를 처벌했다. 미자하의 행위는 다를 바 없었지만 상황에 따라 180도 바뀐 것이다.
사실 민씨 형제와 심온이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또 ‘기쁜 얼굴빛’은 무엇이고, ‘건성건성 박수’는 또 무엇인가. 다 군주의 역린을 건드린 죄였을 뿐이다.
이기환 기자의 이야기 조선사 흔적의 역사, 이기환 지음, BM 책문, 페이지 226-233
夫龍之爲虫也, 柔可狎而騎也; 然其喉下有逆鱗徑尺, 若人有嬰之者, 則必殺人。人主亦有逆鱗, 說者能無嬰人主之逆鱗, 則幾矣。한비자
“용은 짐승이 되어 부드러워 친하면 올라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목구멍 아래에 붙어 있는 직경 한 자쯤 되는 逆鱗(역린 거스르게 하는 비늘)을 만약 사람이 건드리기만 하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고 만다. 임금도 또한 역린이 있다. 설득하는 사람이 임금의 역린만 능히 건드리지 않을 수 있다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의 거역을 유발하는 것이 겨드랑이에 달려있듯이 겨드랑이에도 액하신경이나 임파관등 여러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해부학적으로 겨드랑이는 팔에 가려진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수술을 하는 부위가 된다. 특히 가슴확대수술 보형물이 겨드랑이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또 땀이 많은 다한증이나 냄새가 나는 액취증 수술도 겨드랑이에서 한다.
강남역 8번출구 www.imagediet.co.kr 자향미한의원에서는 유방확대 성형수술등 이런 다양한 수술 흉터를 수술후 흉터침인 OT침으로 치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