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선배. 였던 정윤언니는..
이대 총학생회 선거의 이상한 징크스! 때문에..
93년에 낙선했던..
우리 진보학생연합! 의 직속 선배. 이기도 했는데..
신문방송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재학 중에.. 교지 편집. 일을 하면서도..
내내..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을 정도로..
엄청난 우등생!! 이었기에..
학교 안은 물론이고.. 소위 운동권 내부에서도..
정말 신화 같은(?!) 인물. 이었다!!
너무나도 명석했고, 현명했던 언니는..
자신이 총학생회장으로 출마를 했던..
선거에서는.. 너무나도 아쉽게.. 낙선을 했고..
(낙선을 했던 그 날..
오히려 언니는 너무나도 덤덤. 했는데..
우리는 모두.. 눈물을 펑펑- 쏟았던.. 기억이 난다;;;)
후배였던 우리가.. 출마했던 선거에서는..
정책을 만들고.. 선거 운동을 하는 등의 모든 일들을..
완벽하게! 지휘하면서.. 서포트. 해주었는데..
나중에.. 우리가 총학생회를 운영하면서..
진행하게 될.. 많은 사업들에 대한 아이디어도..
거의 대부분.. 정윤언니의 머리에서 나온 것! 이었다.
(정윤언니 외에.. 몇 명의 언니들이 더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 90학번 선배들은..
대부분.. 매우! 특출 났던 것 같고..
우리는 그저.. 훌륭한 선배들이 남긴 공을.. 덥석-!
받아만 먹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이후에.. 정윤언니는..
우리가 총학생회 활동을 했던.. 94년, 한해 동안..
무려 조기졸업. 까지 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하더니..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뉴욕으로 떠났고..
95년에.. 잠깐, 한국에 왔다가.. 바로 이듬해에..
다시 영화 공부를 위해.. 이번에는 파리로 떠났다가..
98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신문방송학. 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2001년에는.. 우수학생 장학금을 받으며..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거기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2004년부터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까지 했는데..
2005년. 3월 5일.. 잊을 수 없는 그날!!
언니는.. 친구들과 뉴욕으로 놀러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즉사. 하고 말았다. ㅠㅠ
천재. 에 가까웠던 언니의 재능을..
하늘이.. 질투라도 했던 것일까...?
그때.. 언니의 나이.. 만 34세.
너무나도 꽃 같았던 나이. 였는데..
언니는.. 마치.. 외국으로 훌쩍- 떠났던 것처럼..
그렇게.. 훌쩍- 하늘 나라로 떠나버렸고..
언니의 부고. 를 전해 들은 우리는..
정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한동안.. 그저 멍- 했던.. 그런 기억도 난다.
나중에.. 우리는.. (물론 90 언니들이 주도적으로!)
정윤언니가 남겨놓은 각종 자료들과..
우리가 정윤언니를 추억하며 써내려간 편지들을..
모두 모아서.. 이런 책. 까지 만들었고..
언니가 다녔던..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에서는..
언니에게.. ‘최고의 강사상’을 수여하기도 했으며..
기존의 ‘최고의 강사상’의 명칭을..
‘최정윤 우수강사상’ 으로 바꾸어서..
제정, 시상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의 모교, 이화여대에서는..
유족들과 함께.. 언론홍보영상학부에..
‘최정윤 장학금’까지 설립해서.. 수여하게 되었으니..
비록.. 정윤언니의 삶은..
너무나도 굵고 짧은.. 불꽃! 같았지만..
언니가 남겨놓은.. 많은 유산(?!)들은..
오래도록.. 이 세상에 남게 되었고..
그런.. 여러 가지 의미로..
정윤언니는.. 나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영원한 총학생회장. 으로 남게 되었다.
벌써.. 언니가 떠난지도..
13년. 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버렸는데..
문득. 우리에게 항상.. 이정표. 같았던..
그때의 정윤언니가.. 많이도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