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회사 중에서 인사권을 가지고 흔들 수 있었던 곳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뭔가 좀 창피하게 느껴지는 경력이라 그곳에서의 직급이나 활동 등은 내 이력서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근성 있고 쓸만한 사람인가? 하고 뽑았다가 낭패를 봤던 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나 그렇듯 필요한 인재人才는 모자라고, 인재人祸는 넘쳐나기 때문에...)
이력서
키는 188인지 뭔지... 같이 서 있으면 그냥 쳐다보기 불편했던 그 친구의 이력서에는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인턴십 경험과 아마추어 복싱 준우승 타이틀이 있었다.
[해외 인턴십 2회]
해외 인턴십 의 경우는.... 가서 놀고만 왔을 확률이 90% 이상이라 별로 믿지는 않았다.
그래도 개발자 중에는 영어 포비아가 많기 때문에 그것만 아니면 되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도 아니고, 중소기업도 아닌, '영세한 기업'(을 포장해서 벤처나 스타트업으로 부르자)에 이력서를 제출하는 사람 중에서 영어 가능자를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애초에 영어를 엄청 잘한다면 개발자를 할 필요가 없고, 영어 잘하는 개발자 또한 한국에 있을 이유가 없다.
[복싱]
준우승이라니... 복싱을 그렇게 오래 할 정도면 끈기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개발 일이란 것이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이력서 내용 자체로는 괜찮아 보였다.
(뭔들 안 그렇겠냐만...)
복싱은커녕 그때까지 헬스장 한번 제대로 다녀본 적 없는 주제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기억
생각해보면 그냥 키 큰 직원을 한번 부려보고 싶어서 뽑았던가? 하는 순간도 많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 큰 남자 어른이 쫄쫄거리고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며 어떤 우월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병아리 같았다.
키가 180이 넘는데도 그냥 오늘 저녁이든 내일 아침이든 언제고 콱 죽어버릴지 모르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약해빠진 친구였다.
똑같은 내용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알려주는 중에도 일 처리를 못 하기에 그 친구가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적었던 노트를 대신 펼쳐주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었다.
"여기 적힌 메모들은 그냥 나한테 잘 보이려고 시늉만 했던 거냐?" 라든가
"한국말로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알아듣지 못하는 놈이 해외 취업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서 뻘짓만 하고 있으면 되겠냐! 영어로 설명하면 네가 이해하겠냐?"고 했던 거 같기도 하다.
영어권 국가에 개발자로 취업하고 싶다던 그가 Game of Thrones 영문판 책을 출퇴근 길에 들고 다니는 것을 봤었기 때문에 더 화가 치밀어 올라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그 드라마를 최근까지 안 봤던 것일지도..)
아마추어 복싱 준우승자(feat. 180cm 넘음)는 눈물을 찔찔 짜며 죄송합니다만 연신 내뱉었다.
'이게 눈물을 보일 만한 일인가?'하고 내 머릿속에서는 수천 줄의 에러 메시지가 쓰이고 있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직장에서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힘들었을 수도 있지...
어쩌면 우는 시늉을 하는 중에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ㅎ
아니면 진짜 서럽고 답답해서 울었는지도 모르겠다.
암튼, 그랬던 그 친구가 첫 월급을 받자마자 나에게 술을 사겠다고 했다.
술자리를 싫어해서 회사 회식도 다 없앴다니까(그 당시 나의 권력이란-ㅅ-) 얘는 그게 농담인 줄 알았으려나?
기네스?
술 싫어하는 직장 상사를 고집스럽게 끌고 간 곳은 또 분수에도 맞지 않는 Bar였다.
거기에서 당당하게 기네스를 시키던 그 친구를 보며
'지금 얘 월급으로 이걸 몇 병이나 살 수 있더라?', '해외에서 술 마시는 것만 배웠군...', '조만간 그만 나오라고 해야겠구먼...'
요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처량하고 안타깝다.-_-
두 병 정도 마시다가 역시이건 아닌 거 같아 여기 술값으로는 부모님 속옷이나 사드리라고 하고 내 돈으로 계산하고 나왔었다.
@afinesword님 정도로 술에 애정이나 지식이 있었다면 맛나게 마셨을 텐데 병째로 마신 기네스는 비싸기만 하고 맛도 없었다.
"나 좀 잘 봐주십시오." 하고 술을 사줘도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그 친구가 배웠길 바란다.
결국, 그 친구는 3달을 못 버티고 스스로 회사를 뛰쳐나갔다.
어찌 나갔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시 수많은 이력서를 검토하고 면접을 봐야 했기에 귀찮음이 있었을 뿐 별다른 감상은 없었던 거 같다.
지금 마시는 기네스
[술] 맥주가 사람을 만든다 https://steemit.com/kr/@afinesword/axqnt
‘300만개의 거품이 만드는 천상의 부드러움’이라고 흑맥주 기네스 광고에 쓰여 있다. 진짜 300만개인지 내 알 도리가 없으나, 천상의 부드러움은 익히 마셔 잘 안다.
칼님(@afinesword) 글을 읽고 나니 기네스가 맛있다.
종종 사다가 마실 거 같다.
덧, 김보통 에세이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에서 읽었던 '동메달의 비밀' 내용을 생각해보니, 그의 아마추어 복싱 준우승 타이틀도 참가자가 2~3명뿐이 없어서 가능했을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덧2, 4~5년 후에 몇다리 건너 들은 소식으로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외 어딘가에 취업을 했다고 한다. 이제는 울지 않기를.... -ㅅ-;;
덧3, 여행은 잘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