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쳤어. 파리? 그건 시궁창같은 곳이었어. 여기선 아무런 희망도 없지.
내 친구가 자살했을때 바로 여길 떠났어야 했는데..."
황진이: 비맞은 중마냥 궁시렁거리면서 들어오는 꼬락서니 보니 아침도 거르신 모양이네.
앉아요. 누룽지 끓여올테니.
파블로: 나..그림 접을까봐요.
황진이: 아니 왜? 그나마 제일 잘하는게 붓질이잖아요? 왜 그림을 접어? 차라리 목숨을 접지?
파블로: 왠지 위안이 되면서도 미운 여잘세 당신...
황진이: 오늘도 화랑가에 그림 들고 팔러 다녔어요? 어디 좀 봐요.
파블로: 화랑가 것들 전부 눈엔 장식용단추를 박았는지...내 그림을 못알아본다구요.
두고 봐! 이게 다 수억원을 호가할테니!
황진이: 헐! 이건....누굴 그린거람? 너무...비참해.
파블로: 내가 사는 집 아래층에 사는 여인과 딸이라오. 피죽만 끓여도 딸을 주는 여자.
삶의 무게로 휘어있는 등을 보시오. 그리고...저 앨 봐요. 엄마가 얼마나 배고프고 힘든지 모르고 사뿐거리며 죽을 향해 달려들지!
황진이: 그래도 저 아인 희망 아니겠어요? 홀로 남은 저 여인의 마지막 희망...
파블로: 개소리! 저 여인의 중압감과 아이의 경쾌함-그것은 너무나 먼 간격이라오.
이해할 수 없음이며 불통이며 외로움이지. 세상의 압축판일 뿐! 희망은 무슨...
황진이: 너무...그러지 마요. 저 아이도 지금쯤은 알고 있을거에요.
맞아요! 엄만 늘 먹지 못했고...허리도 아팠어요. ㅠㅠ그 때도 알았지만...지금은 더 알아...
파블로: 진이...!
황진이: 당신 그림...대단하네? 사람 속의 과거의 아픔까지 스물스물 일어나게 만들어...다음 그림 봐요.
파블로: 내 친구-데 소토야. 이 자식 압생트를 좋아하지. 그 보다 비싼 술은 마실 돈이 없는건데.
자존심은 강해가지고 압생트가 최고의 술이라나? 신의 눈물방울로 빚어서 만든거라나?
황진이: 거짓말!
파블로: 거짓말이라니?
황진이: 당신 자신을 그린거잖아! 친구를 보며 그렸다 해도 캔버스에 남은건 완전히 당신이야.
세상을 향해 일그러진 입매...영양부족으로 쑥 들어간 볼...겨우 얻은 한잔의 싸구려 술...
그래도 자존의 마음 하나로 차려입은 때구정물 흐르는 코트...
꿈같은 이상과 지독한 현실을 보느라 초점이 갈라져버린 두 눈...저건 친구가 아냐. 파블로!
파블로: 이봐. 당신-
황진이: 당신은 이미...위대한 거짓말장이. 아니....위대한 아티스트네요! 파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