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PEN클럽 공모전 <봄날의 일기> : 햇살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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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날


  1. 내가 초등(국민)학교 3학년 때이다.
    늦은 오후였던 걸로 기억을 한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하얀 천을 씌운 아빠를 집안으로 데리고 왔다.
    분명히 아침에 안 입던 양복을 입고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었는데….

  2. 들어간다. 1평도 안 되어 보이는 사각 공간에 아빠가 들어간다.
    그리고 작은 유리창 너머로 아빠가 타고 있다.
    냄새가 났다. 중학교에 갔을 때 알았지만 그건 단백질이 타는 냄새였다.
    사각 유리창 넘어 열기는 따뜻했다.

  3. 모두 나에게 하얀 보자기에 쌓인 사각 상자를 안으라고 한다.
    차를 타고 산골 암자 같은 곳에 갔다.
    경남 마산 쪽에는 어린아이 발목까지 눈이 오는 날이 드물다.
    그런데 그날은 참 이상했다.
    눈이 많이 왔다.

  4. 사각사각하는 눈을 밟으며 암자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에게 먼저 아빠를 보내드리라고 했다.
    보내기 싫어 상자를 꼭 안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엄마가 아빠를 먼저 보낸다고 상자를 달라고 했다.
    싫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 움큼 쥐고 하얀 눈 위에 하얀 아빠를 보냈다.

  5. 그렇게 잊히는 줄 알았다.
    일 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그때 생각을 하면
    그 따뜻했던 상자의 온기가 가슴에 남아 느껴졌다.
    그리고 난 그 따스함을 느꼈다.
    그렇게라도 아빠를 기억하고 싶었다.

  6. 어느 날부터는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날을 잡고 여친(지금의 와이프)과 함께 마산의 암자를 찾았다.
    그리고 가끔 혼자서도 아빠가 보고 싶은 날에는
    서울에서 차를 몰고 마산으로 달렸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던 그 따스함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7. 결혼하고 수년간 바빠서 찾지 않았던 아빠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그 암자에 배가 엄청 나온 남자가
    자기 배를 만지면 아들이 생긴다고 하길래 만졌다.

  8. 그리고 다녀온 지 100일도 안 되어 아이가 생겼다.
    8년 만에 아이가 생겼으니 주변에서 기뻐해 주었다.
    임신 소식에 너도나도 태몽 이야기를 해준다.
    다음에 배 나온 남자에게 가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9. 매달 압구정 00 산부인과에 갔다. 공주님이란다. 내심 기뻤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배 나온 남자가 사기를 쳤다.
    배만 지면 왕자님 생기게 해준다더니 공주님이다.
    다음에 찾아가면 물어봐야겠다. 사기 친 게 맞는지…….

  10. 곰곰이 생각하던 나를 보던 와이프가 실망했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답했다. 정말이지 나 같은 아들 생겼으면 큰일 날뻔했다는 걸 안다.
    그리고 보니 그 배 나온 남자에게 사기 쳐서 고맙다고 해야 할 것만 같다.

  11. 아이가 어려서, 일이 바빠서, 등등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작년 휴가 때를 맞춰 아빠에게 갔다.
    공주님은 처음으로 할아버지 보러 간다고 신났고
    난 그 배 나온 남자에게 따지러 간다고 심란했다.
    그나저나 배 나온 남자에게 뭐라고 하지?
    고맙다고 해야 하나? 사기 쳐서 책임지라고 해야 하나?

  12. 아빠를 보낸 곳에 공주님을 세웠다.
    이곳에서 어릴 때 할아버지를 보내드렸다고 말해줬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내 눈을 보던 공주님도 훌쩍이기 시작한다.

  13. 눈물이 없다. 그날 아빠를 보낼 때, 훗날 할머니를 보낼 때도 난 울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에서 어린놈이 독하다고 했다. 그냥 그랬다. 울고 싶지 않았다.
    허벅지라도 꼬집어 없는 눈물을 만들어냈어야만 했나?

  14.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곳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일까 할아버지 만나러 온 공주님 앞에서
    이 주책맞은 눈물샘은 눈치 없이 터져버렸을까?

  15. 부인이 공주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해준다. 아마 못다 한 이야기를 하라고 피해 주는 듯하다.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아빠를 기억해낸다. 떠오르는 건 항상 손에 카메라를 쥐고 있던 모습이 떠 오른다.

  16. 갑자기 '아들~! 뭐해~ 찍어'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셔터를 눌렀다.


_DSC4172-편집.jpg


그게 이 사진이다.
셔터는 내가 눌렀지만, 시선은 아빠의 시선이다.

그때 눈이 오던 날
아빠를 여기에 남겨두고 떠나는 나의 모습이 사진 속에서 보인다.

"아빠…. 내가 아빠가 되고 보니 당신이 더 그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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