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물건: '구매력'이라는 물성을 가진 물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hsalbert(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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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책 속에서나 보던 아득한 발화를 오랜만에 봤다.

"화폐는 여러 재화 중 하나다."

이렇게 적어 놓고 '하염없이 생각(navel-gazing)'해 보면, 마치 무슨 명상에 잠기는 듯하다. 일단, '화폐'라는 말이나 '재화'라는 말이나 모두 직관적인 생활 용어와는 꽤나 멀리 떨어진 특별한 의미가 주어지는 말 같다.

하루를 살고 한 달을 살고 일 년을 살면서, '집'을 집이라 부르고 '신발'을 신발이라 부르고 '버스'를 버스라고 부르면서 일상 생활을 하지만 '화폐'를 화폐라고 부르면서 생활하기는 쉽지 않다. 집과 신발과 버스는 각각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물건이지만, 화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ATM에서 현찰 5만 원을 인출해서 손에 쥘 때나 ATM에 입금하려고 현찰 100만 원을 손에 쥐고 있을 때, 이 '종이들이 화폐다'라고 정말 체감할 사람이 있을까?(혹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 집이나 신발이나 버스와 같이 구체적인 물성(materiality)을 가진 물건처럼 우리가 화폐란 것을 느끼고 있을까? 정말?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화폐라는 말을 일상 생활에서 거의 쓰지 않는다. 돈이라는 말은 그보다 자주 쓰지만, 이 돈이란 말도 구체적인 무엇을 지칭하는 의미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 관찰해보라.

화폐는 구체적 물성을 가진 일상 생활의 물건이 아니다. 숫자로 존재하고, 은행 장부상의 데이터로 존재하고, '저 사람 재산이 1000억이래'라고 말할 때처럼 (부동산, 현찰, 예금통화, 금융자산, 외화 등을 포괄하는) 추상적인 형태의 구매력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구매력'이라는 구체적 물성을 가진 물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매력은 물성을 가진 구체적인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화폐는 여러 재화 중 하나다"라는 말은 오묘한 말이 아닌가?

화폐가, 돈이, 구체적 물성을 가지며 존재하는 여러 재화(쉬운 말로, 물건. 물건에 더하여 서비스를 포함할 수도 있다) 중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화폐가, 돈이, 그런 구체적 물성을 가진 물건들 중 하나라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ATM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손에 쥘 수 있는 종이 현찰이 수많은 재화(물건) 중의 하나라는 건가? 은행 장부에 존재하는 숫자 데이터가 수많은 재화(물건) 중의 하나라는 말인가?

"화폐는 여러 재화 중의 하나다."

쉽게 말해,

"돈은 여러 물건 중의 하나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말인가?


돈이란 것이 그처럼 구체적 물성에 구속되는 것이라면, 은행 장부 속의 데이터보다도 더 무형적인 것처럼 다가오는 '암호화폐'가 화폐 구실을 할 수가 없다. 애초부터 돈은 '추상적인 실체'로만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은행 장부 속의 데이터처럼 무형적인 실체로 존재할 수 있고, 암호화폐로도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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