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과 결과는 존재한다.
공은 연기를 뜻하고 연기는 공을 뜻하는 것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상이 어떻게 연기적으로 일어나는지, 즉 원인과 조건에 의존해서 일어나는지, 부분에 의존해서 일어나는지, 생각에 의존해서 일어나는지에 대해 깊이 사유하면 대상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공하다고 하면서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지, 즉 부정하는 것이 무엇이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결국 그 대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다고 잘못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어떤 대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마치 가공의 그림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이 덧없게 보입니다.
이러한 착각은 '현상에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다' 는 것과 '현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는 것의 차이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려면 현상의 연기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공은 연기를 뜻하고 연기는 공을 뜻하는 것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는 존재한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연기하여 일어난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정된 실체가없다는 뜻이라고 이해해야 하며,나아가 원인과 결과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공이란 모든 현상의 존재를 부인하는 '완전히 비어 있음을'뜻하는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현상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 현상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님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탁자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이지 탁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공으로 인해, 즉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자성이 없기 때문에,모든 존재와 현상이 존재하는 게 가능해집니다.공은 이와같이 대상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공의 의미를 이해하면 현상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막연히 현상은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연기를 이해하면 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공을 이해하면 연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나로서는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연기하여 일어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연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즉 공하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쉬운 것 같습니다.
세상이 본래 고정불변한 실체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변화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나무가 잎과 열매 같은 특성들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면 환경이 나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며 겨울이 되어도 잎과 열매라는 특성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나무의 아름다운 특성들이 나무 스스로의 힘으로 생겨난 것이라면 환경에 따라 그 특성들이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이처럼 변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고정된 실체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바로 그렇게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태에서 원인과 결과가 가능해지고 연기하여 일어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어떤 현상이 스스로 존재한다면 다른 요인들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다른 요인들에 의존하지 않으면 연기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함께 기뻐해 주는 좋은 원인을 지음으로서 행복이라는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는 나쁜 원인을 짓지 않음으로써 고통이라는 나쁜 과보를 피할 수 있습니다.
공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때로는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을 강조하고, 때로는 그것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그렇게 번갈아 생각하면 연기와 공 모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 공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상의 본질임을 알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합니다.
색에 고정된 실체가 본래 없는 것이 공입니다.
공은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처럼 여분의 것이 아니라 색 자체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티베트의 현자 총카파는 <보적경><가섭장>의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공이 현상을 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현상 자체가 공하다.
일년 전쯤 라다크에 갔을 때,<이만오천송 반야경>에서 비슷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색은 공으로 인해 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색 자체가 공하다.
찬드라키르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잘못 인식하는 습관으로 인해 대상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색 자체가 공한 것이지,공에 의해서 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공하다는 것은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가요?색 자체입니다.탁자 자체이고 몸자체입니다.마찬가지로 모든 현상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공은 마음이 만들어 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처음부터 공했습니다.
색과 공은 하나이며 별개의 실체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