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지호의 남향집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속상한 일, 짜증난 일들이 사그라들곤 합니다.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도 좋아합니다. 그의 그림을 보며 어느 구름 짙은 오후 델프트의 운하를 거닐곤 합니다.
장욱진 김환기 박수근 이대원 김기창 등 많은 우리의 화가들과 마네 모네 르느와르 세잔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기억합니다.
저는 화가도 미술 평론가도 아닙니다만, 이런 그림사랑이 중학교 시절 시작 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부터 학교가 끝나고 조용히 책을 읽고 싶거나 시험공부를 해야 할 때면 종종 정독도서관을 찾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종로통을 지나 낙원상가 옆 인사동 거리를 지나야 했습니다. 요즘은 가본 지가 오래돼서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인사동엔 화랑이 몇 곳 있었습니다. 그림이 뭔지 잘 몰랐지만 그곳을 지날 때면 화랑 윈도우에 전시된 그림을 보곤 했습니다.
어느 스산한 늦가을, 그날도 여느 때처럼 그길을 걷다가 한 화랑에 전시된 그림 한 점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누구의 작품인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지만 참 잘 그렸다고 생각하며 나름 감상 중이었습니다. 그때 화랑문이 열리더니 화사한 중년의 아주머니께서 들어 오라고 하십니다. 저는 뭘 잘못한 거라고생각하고 놀라 손사래를 치며,
"아니예요. 그냥 보는 거예요." 했더니,
아주머니께서 웃으시며 추우니 들어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라는 겁니다.
얼떨결에 따라 들어가니 녹차 한 잔을 주시며,
"그림을 좋아하니?" 하고 물으십니다.
"예. 그런데 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예뻐서 보는 거예요." 했더니,
"그럼 됐지 뭐가 더 필요하니? 앞으로 그림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들어와. 물론 다른 화랑에 들어가도 괜찮단다." 하십니다.
"전 그림 살 돈도 없어요." 했더니,
"괜찮아. 나중에 어른이 되서 사면 되지." 하셨습니다.
그후로 그길을 지나다 그 화랑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는 화랑엔 거리낌없이 들어 설 수 있게 됐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그림을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을 땐 그곳을 포함한 여러 화랑들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구입한 그림 몇 점이 저의 집 거실에 걸려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날의 차 한 잔은 지금도 제 가슴을 따스히 해주고 있고,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 화랑의 기억은 그림사랑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 전시회에서 구입한 화첩을 뒤적이며 그 거리, 그화랑과 화사하셨던 아주머니를 추억합니다.
김환기 사슴